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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9) 쿄고쿠 가문의 세키가하라 오츠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9) 

쿄고쿠 가문의 세키가하라 오츠성 공방전



게이쵸5년(1600년) 9월 7일, 쿄고쿠 다카쓰구(京極高次)가 농성하는 오츠성(大津城)을 둘러싼 서군의 여러 무장이 오츠성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쿄고쿠 다카쓰구, 운명의 오츠성



7월에 들어가 본격적인 세키가하라가 시작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중진인 마에다 토시이에도 죽어 도요토미 가문 의 균열(히데요시 유언)이 점차 심해집니다. 그런 가운데, 거두의 죽음으로 따라 오대로중에서도 필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종종의 상경 요청에 응하지 않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에 모반의 혐의를 덮어 씌워 아이즈 정벌을 결행하게 됩니다.(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이렇게 되어 부재중이 된 후시미성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공격을 시작합니다.(후시미성 공방전)  이에 오야마에서 평정을 해, 회군을 결의한 이야에스는 말머리를 돌립니다.(오야마 평정) 서군은 오카이성에(서군, 오카이성에 착진), 동군은 오카자키성에(동군, 오카자키성 착진) 착진해 전쟁의 기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서군으로 참전하려 하고 있던 쿄고쿠 다카쓰구는 기후성이 함락된(기후성 공방전)것을 알고는 회군해 버립니다.(다카쓰구 회군)


 회군한 다카쓰구는 조속히 농성을 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불과 3000 정도의 병력과 300정 정도의 총으로, 얼마나 저항할 수 있을까요. 이미, 성내는 결사의 각오를 했을 것입니다. 원래 명문이었으나, 전국시대에서 몰락한 가문을 보던 가신들은 오히려 이 성에서 영광스레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고대했을 지도 모릅니다. 9월 6일 영민들을 피난시키고 마을을 불태워, 포위한 군세를 잘 볼 수 있게 합니다. 이런 준비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9월 7일 오츠성 아래 모리 모토야스(毛利元康)와 그의 남동생 코바야카와 히데카네(小早川秀包) 그리고 명장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를 시작으로 하는 총원 3만 8000남짓의 대군이 등장합니다.



쿄고쿠 다카쓰구 초상화



 한편, 수면 아래에서의 교섭도 시작됩니다. 다카쓰구의 농성 소식을 고, 움직인 것은 오사카성에 있던 챠챠(요도도노)입니다. 다카쓰구의 아내가 자신의 동생인 하츠(죠우코우인)이기 때문에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기타노만 도코로에게 시녀인 고우죠우스(孝蔵主)나 아이바노쯔보네(饗庭局)를 교섭인으로 파견합니다. 그 명목은 다름아닌 오츠성에 있는 마쯔노마루도노(松丸殿)의 구출이었습니다. 그녀는 다카쓰구의 누나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이었던 쿄고쿠 다츠코(쿄고쿠 다츠코)입니다. 이에 기타노만도코로는 다카쓰구에게 사자를 파견합니다.


 하지만 사자들의 설득에도, 다카쓰구는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격은 갈수록 강해져, 9월 9일에는 대포가 포격을 개시합니다. 산노마루는 붕괴되고, 이에 적군이 물밀듯이 밀려오나, 그래도 다카쓰구는 어떻게든 방어를 합니다. 하지만 승산은 전혀 없었습니다. 13일에는 이미 성의 중심 건물만이 남았습니다. 게다가 14일에는, 다시, 기타노만 도코로로부터의 사자가 옵니다. 이에 다카쓰구는 간신히 성문을 엽니다. 그는 죽음을 각오합니다만, 이번에도 빵빵한 와이프의 인맥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어떨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