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후시미성 공방전, 서군의 후시미성 점령
게이쵸5년(1600년) 7월 19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부재중인 후시미성을, 이시다 미쓰나리의 명령을 받은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등이 공격해 본격적인 세키가하라 전투의 막이 올랐습니다.
모리 히데모토 초상화코바야카와 히데아키 초상화
게이쵸 3년(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유언에서 오대로와 오봉행을 임명하고, 불과 6세인 히데요리의 장래를 맡기고 죽음을 맞이 했습니다.(히데요시의 유언)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때 벌써 60세에 가까운 나이, 그도 이제 천하를 손에 넣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어쨌든 지금은 그도 도요토미의 가신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히데요시라고 하는 중심을 잃은 도요토미가는 곧 히데요시와 함께 전투에서 피와 땀을 흘려 온 무투파와 천하를 잡고 나서 정치를 뒷받쳐 온 문치파의 사이에, 큰 도랑이 생기고 있었습니다. 이에야스는 거기에 주목해 후쿠시마 마사노리나 가토 기요마사등무투파의 면면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면서, 도요토미씨의 소유성인 후시미성에 계속 머무르며 '중요 사항은 오대로, 오봉행의 협의로 결정한다'는 유언을 무시해, 중요 사항을 독단으로 결정하기 시작 합니다.
놀라울정도로 잘 버틴 후시미성
물론, 이것은 문치파를 분노시키기 위한 이야에스의 작전이었습니다. 이야에스는 먼저 칼을 드는 것이 자신이 아닌, 상대가 되어 명분을 얻고 싶어했지요. 결국 그는 극단적인 수단을 취합니다. 아이즈의 우에스기 카게카츠에게 트집을 잡아, 아이즈 정벌을 핑계로 후시미 성을 비우게 됩니다.(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이에 후시미성은 도리이 모토타다 (鳥居元忠), 나이토 이에나가(内藤家長), 마쓰다이라 이에타다(松平家忠), 마쓰다이라 치카마사(松平近正) 등이 1,800명 정도의 병사를 지니고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앞에 게이쵸5년(1600년) 7월 19일, 예상대로 미쓰나리의 명령을 받은 모리 히데모토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나타나 후시미성에 공격을 시작합니다. 서군의 군세는 4만 이상의 대군이었습니다. 하지만 후시미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25일에는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29일에는 이시다 미쓰나리 스스로 출진해, 공격합니다. 그래도 후시미성은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가닌자를 사용해, 성의 여기저기에 방화하는 작전을 통해 14일만에 성을 함락시킵니다. 이제, 곧 세키가하라 전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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