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병상의 히데요시, 유언을 남기다
게이쵸 3년(1598년) 8월 9일, 병상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마에다 토시이에등을 불러, 히데요리의 장래와 조선에서의 철군을 맡겼습니다.
이 해의 5월 부터 컨디션이 무너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서히 악화되는 병에, 자신의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습니다. 그는 거성인 후시미성(伏見城)에 여러 다이묘를 소집해 나라의 장래나, 아들인 히데요리의 장래에 대해서 여러가지 유언인 듯한 부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게이쵸 3년 8월 9일, 병상의 히데요시는 사방침(팔꿈치를 걸치는 배게)에 의지하면서 일어 납니다. 그 앞의 왼쪽으로는 도쿠가와 이야에스, 마에다 토시이에, 다테 마사무네, 우키타 히데이에가 앉아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모리 데루모토가 앉아 있었습니다. 이때 히데요시는 매우 허약했으나, 이윽고 말을 하기 시작하자 부채로 다다미를 두드리며 열변을 토해, 이전과 다르지 않는 강렬한 성격을 보여주었다 합니다.
어린 히데요리(좌) 유언장을 쓰는 히데요시(우)
그리고 히데요리가 관백에 오를 때까지 향후의 일은, 이에야스와 데루모토의 두 사람에 부탁했습니다. 또 동서의 일은 이에야스와 데루모토의 두 명에게, 호쿠리쿠의 일은 토시이에에게, 기나이의 일은 5명의 봉행에 맡긴다고 합니다. 게다가 조선에서는, 신속하게 철퇴라고 덧붙입니다. 그리고,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까..' 라며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과 함께 술잔을 주고 받아, 돌아가려 했습니다만, 문득 멈춰 서서 슬슬 이에야스와 데루모토에게 '지금까지 부탁한 일을 잊지 말게.'라고 했습니다. 모리의 가신 사세 모토요시(佐世元嘉)는 '이렇게까지 사후의 일을 명확히 결정한 사람은 없었다!'며 절찬했습니다.
히데요시의 구상은 이에야스가 동쪽을 지배하고, 데루모토가 서쪽을 지배해 기나이를 오봉행이 맡고 그 위에 관백으로 히데요리가 서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덴쇼 16년(1588년)부터 분로쿠 연간(1593년~95년)에 걸친 공가의 일기나 다이묘의 일기, 담화집등에는 당시 히데요시의 구상이 엿보입니다. 도요토미 본가는 코노에(近衛), 다카쓰키(鷹司), 쿠죠(九条), 니죠(二条), 이치죠 (一条)의 고셋키가(五摂家) 즉, 상당히 품격을 지니는 공가와 같은 급이 되었니다. 그리고 도쿠가와,모리, 우에스기, 마에다, 코바야카와 같은 오대로는 쿠가(久我), 덴포린(転法輪), 산죠(三条), 사이온지(西園寺), 토쿠다이지(徳大寺), 키쿠테이고(菊亭), 카잔인(花山院), 오이미카도(大炊御門)와 같은 귀족 가문과 같은 급이 되었습니다. 즉, 이제 공가가 아닌 무가여도 태정관이나 관백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도요토미 가문의 미래를 지지한, 히데요시의 유언
후에 도쿠가와 이야에스가 정이대장군에 올라, 보통 이것으로 이야에스의 세상이 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가문의 품격은 도요토미 가문이 이때도 높아, 도쿠가와는 절대 관백에 오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게이쵸 16년(1611년)의 히데요리와 이야에스의 니죠성 회견에서도, 도요토미 가문의 권위는 건재했습니다. 이때 이야에스가 윗자리에 앉긴 했으나 이것은 히데요리가 관직과 나이 때문에 양보를 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어, 원래대로라면 히데요리가 위에 앉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회견 뒤에서 쇼군에 충성을 맹세할 때, 히데요리는 서명을 하지 않았으니, 그의 특별함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즉, 세키가하라 이후에도 계속해서 도요토미 가문의 영향력은 건재했으며 이것은 미래를 내다본 히데요시의 유언 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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