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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의 나비효과, 타나베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의 나비효과, 타나베성 공방전




 게이쵸5년(1600년) 7월 21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아이즈 정벌로 향해, 그대로 동군이 된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의 성인 타나베성(田辺城)에 공격이 개시되었습니다. 



타나베성의 모습입니다



게이쵸 3년(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유언에서 오대로와 오봉행을 임명하고, 불과 6세인 히데요리의 장래를 맡기고 죽음을 맞이 했습니다.(히데요시의 유언)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때 벌써 60세에 가까운 나이, 그도 이제 천하를 손에 넣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어쨌든 지금은 그도 도요토미의 가신이기 때문이지요. 이윽고 그는 후시미성을 떠나고(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미쓰나리는 작전을 시작합니다.


 모리 데루모토를 끌어들인 이시다 미쓰나리는 뒤이어 쵸쇼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 등 아직 출진하지 않았던 서쪽 지방의 다이묘들의 출진을 막습니다. 게다가 이에야스와 함께 아이즈 정벌로 향한 여러 무장들의 처자식의 귀국을 금지해, 오사카성에 잡아 둡니다. 이것은, 물론 이에야스와 함께 있는 무장들을 서군에 가담 시키기 위한 인질로, 어쩔 수 없이 오사카성에 머무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이 무리한 인질 작전에 저항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중으에, 가토 기요마사나 쿠로다 죠수이 부자의 처자는 잘 탈출합니다. 하지만 이에야스와 함께 아이즈로 향하고 있던 미야즈성(宮津城) 성주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아내 호소카와 가리샤는 오오사카성에의 입성을 거부해 할복해 버립니다.(호소카와 가리샤) 결국, 서군은 이 인질 작전을 중지하고, 오히려 여러 무장의 반감을 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호소카와 유우사이 초상화



 뒤이어, 서군은 동군의 여러 성에 공격을 개시합니다. 우선, 이에야스가 부재중인 후시미성(후시미성 공방전)을 점령했습니다. 뒤이어 서군이 노리는 것은 미야츠성을 버려 타나베성으로 옮기고 방비를 굳힌, 타타오키의 아버지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幽斎)였습니다. 영내에 남는 군사는 극히 소수였고 급히 모은 영민들을 포함해도 고작 500의 군세로, 타나베성을 지켜야 했습니다. 한편, 서군은 한시라도 빠른 기나이 제압을 목표로, 후쿠치야마성(福知山城) 성주 오노기 시게카쯔(小野木重勝)를 대장으로, 1만 5,000의 원군을 보내 타나베성을 포위해, 게이쵸5년(1600년) 7월 21일,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동쪽에서는 아이즈 정벌을 중지한 이에야스가 따르는 여러 무장에게 오사카에서 감금된 처자의 일을 알린뒤, '이대로 자신의 동군에 붙을지, 오사카로 돌아가 서군 에 가담할지를 물어봅니다. 같은 날, 사나다 가문도 둘로 나뉘는 이누부시의 이별이 있었습니다.(이누부시의 이별)


 한편, 30배의 수의 군사에게 둘러싸인 풍전등화의 타나베성이지만 의외로 계속해서 버팁니다. 호소카와 유우사이는  며느리의 명예로운 죽음을 알고, 죽음을 각오한 농성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 서군의 사기는 그다지  않았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조정의 간섭이 있었기 때문에입니다.  호소카와 유우사이는「고금 전수(古今伝授)」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사람에서 사람으로만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 유우사이가 죽는다면 명맥이 끊기게 됩니다. 그렇기에 고요우세이덴노를 비롯한 공가는 그를 죽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고금 전수'는 이런 의식입니다



 결국 덴노는 남동생인 하치죠우노 토모히토 황태자(八条宮智仁親王)를 보내 호소카와 유우사이에게 항복을 권유합니다. 그러나 그는 한 통의 편지로 답을 하지요.


今もかはらぬ 世の中に 

예전인지 지금인지 바뀌지 않는 세상에

心のたねを のこす言の葉 

마음의 씨앗을 남기는 말의 잎은[각주:1]


 그리고 토모히토 황태자에 고금 전수를 실시했다는 「증명서(証明書)」를 보냅니다. 이것을 보고 유우사이의 결사의 각오를 확인한 덴노는 곧바로 칙사를 파견헤, 항복과 개성의 설득을 계속합니다. 서군은 덴노의 뜻에 이렇다 할 공격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9월 13일 세키가하라의 전투의 이틀전 유우사이는 성문을 엽니다. 이 2개월 가까이, 서군은 1만 5000의 군사를, 단지 타나베성을 지켜보는데소비해 버려, 이 시기의 기나이의 제압에 크게 영향을 줍니다. 후에 이야에스는 이 일을 알고 매우 기뻐했다고 합니다. 단 500명의 군세로 전황을 뒤집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가히, 세키가하라의 나비효과라 불러도 될 듯 합니다.

  1. 시대가 흐르더라도 자신의 '고금전수'는 남을 것을 표현한 노래입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