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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야마 평정(1) 이야에스군, 오야마에 착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야마 평정(1) 이야에스군, 오야마에 착진



 게이쵸5년(1600년) 7월 24일, 아이즈 정벌로 향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원정군이, 시모쓰게(下野) 오야마(小山)에 진을 쳤습니다. 


 7월에 들어가 본격적인 세키가하라가 시작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중진인 마에다 토시이에도 죽어 도요토미 가문 의 균열(히데요시 유언)이 점차 심해집니다. 그런 가운데, 거두의 죽음으로 따라 오대로중에서도 필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종종의 상경 요청에 응하지 않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에 모반의 혐의를 덮어 씌워 아이즈 정벌을 결행하게 됩니다.(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이렇게 되어 부재중이 된 후시미성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공격을 시작합니다.(후시미성 공방전)  이에 이야에스는 확실한 명분을 가지게 됩니다. 상관인 도요토미 가문에 모반하는 것이 아닌, 가내의 분쟁을 해결하러 하는 것이지요. 



코야마에 착진한 이야에스



 이에야스는 7월 8일, 선봉으로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康政)를 출진시켜, 스스로도 7월 21일에 아이즈를 향해 에도성을 출진합니다. 22일, 23일, 계속해 아이즈에 진군 하는 중, 게이쵸5년(1600년) 7월 24일 시모쓰게 오야마에 진을 칩니다. 이날 저녁, 후시미성의 부재중을 맡고 있던 토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의 통치가 닿습니다. 바로 후시미성이 공략당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야스는 7월 23일에, 데와의 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에게 전투 중지, 즉 아이즈 정벌이 없어진 일을 고하는 편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즉, 그는 원래 서쪽으로 향하려 했었다는 것입니다.



눈치없는 무장, 하나부사 모토유키



 그러자, 부담이 되는것이 아이즈의 우에스기였습니다. 당시에 에치고에 잇키(에치고 잇키)를 일으키는 등, 활발히 전투를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 게다가, 히타치의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습니다. 아이즈 정벌에 참여하긴 한다고 했으나, 군세를 움직이지 않았던 것으로 그가 동군에 붙냐, 서군에 붙냐는 아직 모르는 상태였지요. 이런데 오야마에 '사타케군이 배후를 공격한다'라는 소문이 흐릅니다. 하나부사 모토유키(花房職之)가 이때 적절한 타이밍에 도착합니다. 히젠의 무장으로 우키타 히데이에의 가신인 그는 임진왜란때 직언을 했다가 쫓겨나 사타케 가문에 의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야에스에게 사타케는 절대 쳐들어 올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야에스는 그에게 서약서를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 대답을 들은 이야에스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 후에 한마디 말을 했습니다.


"그것은 곤란합니다. 부자라 해도 그 마음을 모르는 경우도 있씁니다. 절대라고 약속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일은 꽤 잘하는 무장이라 생각했지만, 별 거 없구만."


 후에 하나부사 모토유키는 동군으로 세키가하라에 참전해 8000석의 영지를 얻습니다만, 결국 다이묘와 하타모노(旗本)를 가르는 경계선인 1만석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사실 전국시대에 서약서는 큰 힘이 없었습니다. 단지, 이야에스가 요구한 것은 바로 일종의 퍼포먼스였습니다. 불안에 떨고 있는 군세를 위안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하지만 눈치채지 못한 그는 거부했지요. 히데이에의 일도 그렇고 그는 상당히 눈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후에 「시시세이단(志士清談)」에서 모토유키는'옛날, 오야마의 진영에서 서약서를 쓰라는 부탁을 들었을 때 거절했으니, 나는 일생 훌륭한 무장이 되지 못한 것이다. 명장을 시중드는 사람은, 그 사람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았어야 했다. 한심하구나.' 라고 쭉 후회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이야에스는 군의에서 기나이로의 회군을 천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