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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5) 세키가하라의 전초전, 기후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5) 

세키가하라의 전초전, 기후성 공방전



 게이쵸5년(1600년) 8월 22일,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인 '기후성(岐阜城) 공방전'으로, 최초의 야전이 시작되었습니다. 


 7월에 들어가 본격적인 세키가하라가 시작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중진인 마에다 토시이에도 죽어 도요토미 가문 의 균열(히데요시 유언)이 점차 심해집니다. 그런 가운데, 거두의 죽음으로 따라 오대로중에서도 필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종종의 상경 요청에 응하지 않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에 모반의 혐의를 덮어 씌워 아이즈 정벌을 결행하게 됩니다.(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이렇게 되어 부재중이 된 후시미성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공격을 시작합니다.(후시미성 공방전)  이에 오야마에서 평정을 해, 회군을 결의한 이야에스는 말머리를 돌립니다.(오야마 평정)



기후성 공격을 위해 진군하는 동군



 8월 8일에는 호쿠리쿠에서 아사이나와테 전투(아사이나와테 전투)가 일어나는 등 세키가하라의 전초전이 전개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토카이도를 서쪽으로 진군하는 동군은 카즈토요(一豊)의 카케가와성(掛川城)을 거치고, 마사노리의 오와리 키요스성(清洲城)으로 진군합니다. 이런 이들 앞을 도요토미 측에 붙은 오다 히데노부(織田秀信)의 거성 기후성이 막아 섭니다. 기후 성주 오다 히데노부는, 그 오다 노부나가의 적손으로 키요스 회의(키요스 회의)에서 히데요시가 후견을 맡았던 산포시 입니다. 이 때 그는 21세의 젊은 무사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사이토 도산의 난공불락의 이나바야마성을 노부나가가 겨우 점령해(이나바야마 공방전), 기후성으로 이름을 바꾼 이 성은 견고하기나 화려하기가 비할데 없었습니다. 



오다 히데노부 초상화



 하지만 이 난공불락의 성에 진군하는 것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이케다 데루마사(池田輝政), 야마노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의 세 명 입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야마노우치 가즈토요는, 원래 히데요시 산하의 무장입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부아였지요. 노부나가가 이 기후성에 있었을 무렵, 그들도 모두 기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기후성의 지리는 익숙했습니다. 이케다 데루마사는 노부나가와 젖형제의 가계로, 이전에는 기후 성주를 맡고 있었으니까, 기후성은 그들의 손바닥 안이었습니다.


 게이쵸5년(1600년) 8월 22일 그들은 기후성에 도착합니다. 히데노부는 과감하게 요격을 결의합니다. 그것도 화려한 의상을 입은 채로 등장합니다. 사실 이것은 수적으로 열세인 자신의 군대에 기운을 불어 넣고, 상대에게 자신이 오다 노부나가의 후손임을 강조해 공격에 망설임을 주려는 작전이었습니다만, 통하지 않습니다. 대패한 히데노부는 기후성에서 농성을 시작하나, 이들의 사기는 이미 바닥입니다.



기후성 함락되다



 다음날 23일에는, 후쿠시마대, 이케다대, 야마노우치대가 일제히, 성벽으로 진군해 총공격을 시작해 금새 성안으로 쳐들어 옵니다. 적은 총원 3만 5천의 대군입니다. 거기에에 비해, 성을 지키는 것은 불과 6천이지요. 게다가, 원래 의욕 이 없던 성병들은, 항전을 단념해 기후성은 함락 돼 버립니다. 히데노부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할복하려 하나,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그에게 '우리는 노부나가님을 배신하려는 것이 아니다.'라며 설득을 해 그를 살게 합니다. 


 결국, 히데노부는 코노야마에 보내져 불가에 입문해 5년 후의 게이쵸10년(1605년) 5월 8일, 26세의 젊음으로 죽게 됩니다. 그에게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야사에는 여자 아이가 있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습니다) 전국시대 삼걸 중 하나인 노부나가의 본가의 혈통은, 여기서 단절되어 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