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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2) 서군, 오카이성에 착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2) 서군, 오카이성에 착진



 게이쵸5년(1600년) 8월 10일, 세키가하라의 전투를 앞두고, 서군의 이시다 미쓰나리가, 오카이성 앞에 진을 칩니다.


 7월에 들어가 본격적인 세키가하라가 시작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중진인 마에다 토시이에도 죽어 도요토미 가문 의 균열(히데요시 유언)이 점차 심해집니다. 그런 가운데, 거두의 죽음으로 따라 오대로중에서도 필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종종의 상경 요청에 응하지 않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에 모반의 혐의를 덮어 씌워 아이즈 정벌을 결행하게 됩니다.(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이렇게 되어 부재중이 된 후시미성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공격을 시작합니다.(후시미성 공방전)  



미쓰나리는 오카이성으로 들어갑니다



 후시미성 함락과 함께 할복한 성주 토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의 목은 곧 오사카에 옮겨집니다. 미쓰나리는 이 목에 예를 다하고, 타카미무스히(高御) 대(台)에 놓아 오사카성의 쿄우하시구(京橋口)에 놓았다고 합니다. 「토리이 가문 중흥보(鳥居家中興譜)」에 의하면, 이 일을 전해 들은 모토타다와 은고가 있는 교토의 상이 사노 시로우에몬 코레유시(佐野四郎右衛門此由)라는 인물이 서둘러 오사카에 가서, 경비 몰래 모토타다의 목을 훔치고 밤새 교토에 돌아가, 절에서 공양한 후 은밀하게 매장했습니다. 얼마뒤 목이 사라진 것을 알고 탐문을 하는 미쓰나리에게 그가 자백하자, 미쓰나리는 그의 충의에 감동해 없던 일로 해 주었습니다.


 8월 9일, 미쓰나리는 3,000뿐인 군사를 인솔하고, 미노의 타루이(垂井)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타루이에게는 군이 머무를 곳이 없습니다. 여기서 미쓰나리는, 서군에 참여 하는 일을 표명하고 있던 오카이성(大垣城) 성주 이토 모리마사(伊藤盛正)의 노신 이토 타노모(伊藤頼母)를 설득해 오카이성에 머우르게 됩니다.



오카이성 전경, 세키가하라 전투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미 오오타니 요시쓰구는 호쿠리쿠 방면의 공략을 시작하는 와중에, 미쓰나리는 군의 일부를 타나베성(타나베성 공방전), 아노쓰성(安濃津), 마츠자카성(松阪城)으로 파견합니다. 이즈음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나 나가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는 미노, 오와리 방면에 진출합니다. 그리고 총대장인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와 마시타 나가모리(増田長盛)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보좌해 오사카성에 머무는, 서군의 태세가 갖추어집니다. 이 분위기를 보면 서군측은 이미 이 시점에서, '세키가하라 부근에서 동군과 결전이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 가운데, 미쓰나리는, 타카하시 슈리(高橋修理)라는 서 미노의 무장을, 아군에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같은 서 미노 출신의 히로세 고노쓰게(広瀬兵庫助)라고 하는 무장에게 얼마의 금전을 가지고, 그에게 보냅니다.「세키란요시(石卵余史)」에는 이 둘의 회담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알고있는가? 얼마 뒤면 큰 전투가 일어난다네. 군을 가지고 서군으로 참전해 주지 않겠는가? 승리가 밝아올 때, 미노의 절반을 주겠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는 무로마치 때부터 이 토지에 뿌리를 박고 살았다네. 실은, 히데요시 공이 우리에게 비슷한 제안을 한 적이 있었네. 하지만 우리의 가훈은 '지금 이상의 물건을 바라지 말라.'라는 것이네, 미노의 절반은 매력적이지만, 가훈을 어기면 어떤 천벌을 받을지 모르니, 우리는 중립을 유지하려 하네."


"여기서 우리의 제안을 무시한다면 도쿠가와의 편이라 의심되어 영민이 몰살당하고, 영지를 빼앗길 지도 모르네!"


"어째서 적대하지도 않는 우리를 공격하려 하는가? 천하를 지배할 대단한 인물에게 그냥 이 영지를 중립으로 인정해 달라고 하고 싶네."


 '천하를 지배할 대단할 인물'이라면 영지를 치는 것이 망설여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는 성공적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중립을 완수해 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