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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4) 다테 마사무네의 행보는?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4) 다테 마사무네의 행보는?


 게이쵸5년(1600년) 8월 12일, 우츠노미야성(宇都宮城)에 들어가 있던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가 기타메성(北目城)의 다테 마사무네에게, 협력해 동군에 서달라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게이쵸5년(1600년) 8월 12일에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서 다테 마사무네에게 협력 요청이 갑니다. 바로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동군에 서달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키가하라는 기후에 있습니다. 즉, 마사무네와는 강 건너 불인 이야기 입니다. 미야기현, 게다가 우츠노미야성에 있는 히데타다는 이 후, 세키가하라에는 늦지 않고 참존해 동군의 주력이 됩니다. 한편 서군의 총대장인 모리 데루모토는 오사카성에 머문 채로, 주력은 이시다 미쓰나리와 그 동료들 입니다. 현재까지, 드라마나 소설로 종종 그려져 온 세키가하라이제만, 이 때, 동시에 일어난 토호쿠의 세키가하라라고도 할 수 있는 사건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때, 우에스기는 서군측 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동군측에 참가 해 토호쿠의 동군을 이끈것이 다름아닌 다테 마사무네 입니다.


다테 마사무네 초상화


원래, 생전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만약의 일이 있었을 때 아직 어린 아들 히데요리를 지지해 도요토미가를 지키도록, 오대로와 오봉행을 시작으로 하는 부하들과 여러가지를 약속을 해 놓았습니다. 히데요시의 사후, 그 약속을 최초로 찢은 것은, 다름아닌 이에야스와 마사무네입니다.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마에다 토시이에가 죽자, 원래 도요토미 가문 내에서 피어오르고 있던 무투파와 문치파의 갈등이 점화됩니다.(이시다 미쓰나리 습격) 그리고 서서히 도쿠가와 이야에스가 야욕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게이쵸 4년(1599년) 이야에스의 6번째 아들 마쓰다이라 다다테루(松平忠輝)와 마사무네의 장녀 이로하공주(五郎八姬)가 약혼합니다.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유력 영주끼리의 혼인을 금지시킨 히데요시를 무시한 것입니다.


 이때, 우에스기가 지배하고 있는 아이즈는, 원래 마사무네의 영지입니다. 오다와라 정벌의 출발이 늦어진데다, 카사이 오사키 잇키의 주모자라 의심돼( 카사이, 오사키 잇키) 마사무네의 영지는 대폭 줄고,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의 것이 된 아이즈는 가모 우지사토가 죽은 뒤, 우에스기의 손 안에 있었습니다. 도요토미가 우대한 우에스기이기 때문에, 이대로 도요토미의 세상이 계속 되면 한층 더 영지가 줄어들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사무네는 원래의 영지, 다테군도 포함해 영지를 되찾고 싶어 했기에 도요토미에 반기를 드는 이에야스의 편에 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여기서 천하가 다시 혼란스럽게 되면 그 혼란을 타고, 다시 오슈의 패왕이 되는 것도 가능할지 모릅니다. 아니요 아직도 나이 젊은 정종이라면, 천하를 노리는 일도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이러한 계산 아래서 아이즈 정벌과 동군에 설 것을 각오합니다.


 이 때, 이에야스가 명한 여러 무장의 움직임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쪽의 시라카와구치(白河口)는 이에야스 본인과 아들 히데타다가, 동쪽의 센도구치(仙道口)에서는 사타케 요시노부 (佐竹義宣), 시노부구치(信夫口)에서는 다테 마사무네, 북쪽의 요네자와구치(米沢口)는 모가미 요시미쯔(最上義光), 서쪽의 츠가와구치(津川口)에는 마에다 토시나가(前田利長)와 호리 슈지(掘秀治)가 맡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토호쿠가 분주하게 되는 중에, 우에스기 가문도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7월 22일에는, 우에스기의 가로 나오에 키네츠구가 에치고 잇키를 선동해, 현재의 에치고의 영주인 호리 슈지를 견제합니다.(에치고 잇키) 이때 마사무네는 북상해 온 이에야스가 오야마에 도착한 7월 24일, 이미, 우에스기령의 최북단에 있는 시라이시성(白石城)에 공격을 시작해 다음날인 25일에는 함락시켜버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상황이 바뀝니다. 후에, '오야마 평정'이라고 불리는 25일의 군의에서 이에야스는 함께 아이즈 정벌로 온 여러 장군에게, 아이즈 정벌을 중지하고 서쪽으로 돌아갈 것임을 발표합니다.(오야마 평정)  이미 7월 19일부터, 이에야스가 부재중으로 한 후시미성에, 이시다 미쓰나리의 명령을 받은 모리 히데모토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공격이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후시미성 공방전)


우에스기는 왜 추격을 하지 않았을 까요?


 이것에 대해, 키네츠구가 이에야스를 토호쿠에 끌어당겨, 그 사이에 미쓰나리가 군사를 일으킨다고 하는 밀약이 있었다던가, 반대로 이에야스가 미쓰나리의 공격을 유발하기 위해서, 일부러 아이즈 정벌을 구실로 후시미성을 부재중으로 했다던가 라는 다양한 설이 있습니다만, 모두, 확고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이에야스는, 여러 장군에게 '서군에 붙고 싶은 사람은, 사양하지 않고, 여기서 떠나 주어 함께 와 주는 사람은 남아 줘'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처자는 오사카성에 인질 상태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쿠시마 마사노리나 야마노우치 가즈토요등 토카이도에 성을 가지는 무장등이 솔선해 지성과 병량을 제공하는 전면 협력에, 그 자리에서 서군으로 간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이것에 의해, 잠시 아이즈는 정전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에야스는, 차남 유우키 히데야스(結城秀康)를 우츠노미야성에 배치해 우에스기의 공격에 대비하는 것과 동시에, 마사무네나 요시미쯔의 동향에 주위를 기울이도록 명하고 자신은 거성인 에도성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의 고취입니다. 아이즈정벌에 참여하겠다고는 했지만,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 그들에게 이야에스는 의심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는 북 간토의 무장들에게 사타케의 동향을 조사해 달라고 하고 에도성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여러 영주들에게 편지를 보내지요.



백만석 보증문서, 이것으로 마사무네도 대영주가 될지도...



 호소카와 다다오키에게는 타지마를, 가토 기요마사에는 히고, 치쿠고를 보증하고, 마사무네도 8월 22일부로, 승리한 뒤 카리타, 다테, 시노부, 니혼마츠, 시오마츠, 타무라, 나가이 등 옛 영토 7곳 즉, 50만석을 증가시킬 약속을 합니다. 이것을「백만석 보증문서(百万石のお墨付き)」라 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도요토미 은고의 무장을 중심으로 구성한 토카이도의 서쪽으로 향한 발대가 제대로 동군에 설지 판별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철퇴하는 이야에스를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내버려 둡니다. 어째서 추격을 하지 않았는지 의문입니다. 드라마 '천지인'처럼 의를 중시하는 카게카츠였기에 추격을 금지시켰던 것일까요?


 이 후의 역사를 생각하면 이 때 우에스기의 추격이 없었던 것이, 천하를 나눈 분기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추격을 진언했지만 거부당한 키네츠구는 국경을 접하고 있는 모가미의 영지를 점령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공합니다. 그것이, 세키가하라의 전투와 같은 날에 발발하는 하세도우 전투입니다. 마사무네는 여기서 동군으로 출병해 우에스기와 싸웁니다. 하지만 정작 세키가하라가 불과 하루만에결착이 붙어 버립니다. 뭔가 시원찮은 마사무네는 이야에스의 말을 무시하고 우에스기를 공격하다 2만석만 영지가 증가합니다. 하지만 그의 야심은 아직 남아 있었으니, 후에 하세구라 쯔네나가(支倉常長)와 관련된 일이 일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