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다테 마사무네, 히데요시를 배반? 카사이, 오사키 잇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다테 마사무네, 히데요시를 배반? 카사이, 오사키 잇키




 덴쇼 18년(1590년) 11월 2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 정벌에 반발해 10월 무렵에 발발하고 있던 카사이(葛西), 오사키(大崎) 잇키로, 잇키 세력에 포위되어 고립상태로 농성하던 사누마성(佐沼城)의 키무라 요시키요(木村吉清), 키요히사(清久) 부자가 구출되었습니다.



전국시대의 오슈 붉은색: 텐분란때 반 다테 세력 파란색: 텐분란때 친 다테 세력 녹색: 중립세력들



 덴쇼 18년(1590년)의 3월 말, 호조의 오다와라성 정벌에(오다와라 정벌 시작)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산하에 들어오지 않은 토호쿠의 여러 무장에게, 오다와라 공격에 참전하도록 명령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3개월에 걸치는 싸움의 끝인 7월 5일에 오다와라성이 함락 된 후 호조 우지마사가 할복, 아들 우지나오가 코노야마에 들어가, 사실상 호조는 멸망 합니다.(호조멸망)。 히데요시는 곧 바로 오슈 정벌에 착수했습니다. 그것은 히데요시의 요청에 답해 오다와라공격에 참전한 사람들을 우대 하고, 참전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처벌을 준다는 것 입니다. 이 히데요시의 정벌로 오사키 요시타카(大崎義隆), 카사이 하루노부(葛西晴信), 이시카와 아키미츠(石川昭光), 시라카와 요시치카(白河義親)의 영지가 몰수되어 오사키, 카사이의 영지는 히데요시의 측근인 키무라 부자에게 주어졌으며, 늦게 참전한 마사무네의 영지의 일부는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 가운데 10월에 들어가 발발한 것이 오사키와 카사이의 옛 중신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의 잇키입니다. 농민이라고 해도, 토호쿠의 경우는 반무사 반농민인 농민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은 오사키,카사이가 남북조 이전부터 계속 되는 명문의 유파를 이어받는 가계인 일에 자긍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요시타카, 하루노부를 대신해 오사키, 카사이의 땅이 주어진 키무라 요시키요는 시로쯔메(城詰め: 성에서 근무하는 무사)에서 발탁된 이로, 영지의 통치에 관해서는 완전한 초심자입니다. 히데요시의 명령대로 새로운 영지에서, 백성에게 측량이나 도수령을 단행합니다만, 커다란 반대에 직면한데다, 자신의 가신을 통솔하지 못해, 가신들의 백성 약탈 행위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



 그런 키무라 부의 실정에 불만을 품어 발기한 잇키의 민중은 아차하는 사이에 키무라 부의 거성 사누마성을 포위합니다. 잇키의 맹위는 한층 더 오사키, 카사이의 옛 영토에 퍼져 키무라 부자는 사누마성에 농성 솔직하게 고립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통지를 들은 히데요시는 조속히 데와 요네자와성(米沢城)의 다테 마사무네와 무츠 쿠로카와성(黒川城)의 가모 우지사토를 사누마성의 구원으로 향하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파견된 두 명의 대장은 큰 갈등을 빚어 버립니다. 어떻게든 잇키의 틈새를 타고, 덴쇼 18년(1590년) 11월 24일 키무라 부자는 사누마성으로부터 구출되어 묘우성(名生城)에 보호됩니다. 두 명의 대장의 분열의 원인은 바로 이 잇키의 배후에 다테 마사무네가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오슈의 패왕으로 불린 마사무네는 오다와라성을 포위중이던 히데요시에 죽음을 각오해 면회한 덕분에(마사무네의 면회), 오사키나 카사이와 같이 모든 영지를 빼앗기는 일은 없었지만 상당한 영지가 몰수되었습니다. 지금 잇키세력에 당한 키무라 부자의 통치가 통하지 않는것 역시 마사무네같은 전의 오슈의 무장들의 영향력은 아닌가 라는 것입니다. 만약 마사무네와 큐슈의 시마즈등이 들고 일어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로서는 다시한번 천하통일을 위한 정벌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혹은, 마사무네가 잇키를 제압한 일로 다시한번 오슈의 자신의 영향력을 각인시키면, 머지 않아 토호쿠를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맡겨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할미새의 화압



 이를 의심한 우지사토는 키무라 부 구출 이후 4일이 지난 11월 28일 마사무네와 서약문을 주고 받아, 배반하는 일 없이, 함께 협력해 잇키의 진압에 임하는 일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이윽고, 교토의 마을에서는 '잇키세력이 점령한 성에는 다테가가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는 소문까지 흐르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우지사토는 마사무네의 배반의 증거를 확보합니다. 잇키 앞으로 보낸 마사무네 자필의 '격려문', 게다가 그 밀서에는 정중히 마사무네의 '할미새(鶺鴒)의 화압(花押: 싸인)'이 써져 있었습니다. 의혹이 확신으로 바뀐 우지사토는 곧 바로 교토에 있는 히데요시에 이 사실을 보고합니다.


 이에 격노한 히데요시는 즉시 마사무네를 호출합니다. 덴쇼 19년(1591년) 1월, 마사무네는 히데요시를 만나기 위해, 교토로 향합니다. 오다와라 공격의 참전이 늦었을 때조차, 죽음을 각오해 히데요시를 만나러 간 마사무네는 또다시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인 것입니다. 이 위기를 그는 어떻게 극복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