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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다테 마사무네, 오슈 발발 잇키의 변명에 성공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다테 마사무네, 오슈 발발 잇키의 변명에 성공하다



 덴쇼 19년(1591년) 2월 4일, 앞의 카사이, 오사키 잇키의 주모자라고 의심된 다테 마사무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서 변명하기 위해 상경했습니다.


 외눈의 영웅 다테 마사무네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덴쇼 18년(1590년) 7월에 오다와라성을 점령해, 관동에 군림한 호조를 멸망시켜(호조 멸망), 확실히 천하를 수중에 넣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 기세로, 오슈 정벌을 합니다. 그것은 전투라고 하는 것보다 오다와라성 공격때 참전하지 않았던 사람을 처분하고, 참전한 사람을 우대 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영지가 몰수된 토호쿠의 무장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남북조대부터 오슈를 지배하는 명문 입니다. 그들은 히데요시야같이 미천한 신분으로 급작스레 출세한 이를 따를 수가 없었지요. 이렇게 해서 '카사이, 오사키 잇키'가 발발합니다.(카사이, 오사키 잇키) 그리고 이 진압 과정에서 가모 우지사토는 다테 마사무네가 이 잇키의 중심에 있다는 증거를 발견하고, 마사무네는 변명을 위해 상경합니다.



마사무네의 상경 행렬



 히데요시와 우지사토는 장대한 쥬라쿠에서 마사무네를 기다립니다. 이 때, 히데요시는 56세, 우지사토는 35세, 그리고 절체절명에 빠진 마사무네는 아직 25세입니다. 게다가 마사무네가 변명을 위해서 히데요시의 앞에 등장하는 것은, 오다와라성 공격에 늦었을 때(다테 마사무네 면회)에 이은 2번째입니다. 그 때는, 죽음을 각오해 시니쇼우조쿠(死装束: 수의)를 입은 퍼포먼스로 히데요시의 마음을 움직인 마사무네였지만, 이번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고 더욱 심각한 사태입니다. 반역을 도모한 것이니 말입니다.


 교토를 지나는 마사무네는 예의 시니쇼우조쿠를 입고, 그 행렬의 선두에는 금박이 칠해진 하리쯔케바시라(磔柱) 즉, 황금의 십자가를 앞세운 행진이었습니다. 이것에 교토의 사람들은 깜짝 놀라나, 이미 오다와라성에서 마사무네의 퍼포먼스를 맛본 히데요시는 침착하게 그의 앞으로 온 마사무네에게 말을 겁니다.



변명하는 마사무네



"호오, 죽음을 각오했는가? 이는 잇키의 주모자인 일을 인정하는 것인가?"


"저는 모반을 도모한 적이 없습니다. 관백 전하에 대한 제 충성심에는 한 점 흐림도 없습니다."


너무 당당한 그의 말에 담시 당황한 히데요시와 우지사토 였지만, 이윽고 우지사토가 소리쳤습니다.


"내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을 모르는가? 이 격려문은 그대가 쓴 것이 아닌가? 이것이 기억에 없다고는 못할 것이다!"


"분명히 제 필적과는 비슷하지만, 제가 쓴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있는 화압(花押)은 그대의 것이 아닌가!"


 이에 마사무네는 차근히 그 격려문을 읽고는 차분히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합니다. 이 태도에 과연 히데요시도 더이상 참지 못하지요. 그의 분노에 가득찬 일갈에 좌중에는 적막이 흐르게 됩니다.


"아뢰옵기 황공합니다만 관백 전하, 저는 몹시 소심해 주위를 믿지 못하는 남자입니다. 아무리 특이한 화압이라도 오랫동안 저와 함께한 가신이나 가족이라면 흉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


 "그렇기에 저는 한 가지 특이한 세공을 했습니다. 제 화압에는 할미새의 눈 부분에 만져보면 알 수 없게 바늘로 찔러 구멍을 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격려문에는 그 바늘자국이 없습니다. 이것은 누군가가 제 필적을 흉내내 만든 것입니다."


 이에 당황한 히데요시는 지금까지 다테 마사무네가 보낸 편지를 모두 가지고 와, 하나하나 살펴 봅니다. 그가 말하는 대로 화압에는 할미새의 눈에 부분에 분명히 바늘자국이 있었습니다. 몇번이나, 편지를 보고 비교한 우지사토도 마사무네의 말에서 잘못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 부분입니다



"이 바늘자국은 아무도 모르는 극비입니다. 관백전하이기에 말씀드린 것이니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게 해 주십시요."


 아까와는 또 다르게 적막이 흐릅니다. 하지만 히데요시와 마사무네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습니다. 잠시 후 히데요시는 크게 웃으며 그를 용서합니다. 그는 이 일로 정말로 마사무네가 이 잇키의 주모자인 일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예전부터 만들어 오고 있던 마사무네의 지략에 감복한 것입니다. 오히려 이 일로 히데요시는 마사무네를 평가해 중용하려 합니다. 


  이 뒤, 마사무네는 5월에 요네자와성으로 돌아와, 잇키 토벌을 재개시켜, 7월에는 잇키 세력에 점거되고 있던 사누마성을 탈환합니다. 거점을 잃은 잇키는 급속히 기세를 잃어 얼마 뒤 종식을 맞이합니다. 히데요시는, 잇키가 진압된 뒤 키무라 부자에게 준 영지를 전부 그대로 마사무네에게 줍니다. 잇키의 중심이었던 오사키 요시타카(大崎義隆)는 우지사토의 가신이 되고가사이 하루노부(葛西晴信)는 생사가 불명하게 됩니다. 다테 마사무네는 또한번 위기에서 벗어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