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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도쿠가와 이야에스, 에도성에 들어가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도쿠가와 이야에스, 에도성에 들어가다



 덴쇼 18년(1590년) 8월 1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들어갔습니다.


 8월 초하루를 핫사쿠(八朔)라고 합니다. 이 날, 농가에서는 새로운 곡물을 거둔 것을 축하하는 '타노미노 셋쿠(田実の節句)'라고 하는 행사를 합니다. 이 축하의 기원은,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제일 오래된 설은, 죠큐의 란(承久の乱) 후의 고사가덴노(後嵯峨天皇)가 덴노가 되기 전의 불우하던 시절에, 가신이 타네지쯔(田実: 벼)를 헌상 해 위로한 것을 즉위 후에 항례의 행사로 했다고 하는 것 입니다. 아무튼 가마쿠라 시대의 후기부터, 무가의 사회에서도 이 풍습이 받아들여져 8월 1일을 축하하게 됩니다. 


 그리고 에도시대에서 부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들어간 경사스러운 날'로 이라는 막부의 중요한 행사가 되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야에스가 에도로 향한 것은 히데요시의 의견이었다(히데요시의 논공행상)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결과적으로 이야에스는 제갈공명의 재림이라던 오오타 도칸이 지었던 에도성을 거성으로 삼으려 합니다. 하지만 이 성은 오래 방치되어, 다다미나 맹장지도 너덜너덜했습니다. 그 무렵의 에도는 정말로 시골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에도에는 광대한 관동 평야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생각에 따라 신도시를 건설하려 한 것입니다.



이야에스의 에도성



 그의 생각대로 여러 도로를 정비하고, 수로가 만들어지자 복잡한 도로망을 지닌 철벽의 요새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에도는 천여년간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이야에스 자신도 도교의 신인 '토쇼다이곤겐(東照大権現)'으로 모셔져 귀문에서 에도를 지켰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 그가 처음 들어갔을 때 불과 2천여 명 뿐이었던 에도의 인구는 5대 쇼군의 무렵에 백만명이나 되는 사람이 사는 곳이 됩니다.


 그가 에도성에 자리잡은 것을, 조정과 거리를 두려는 시도였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마지막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쫓아낸 일로, 유명무실화 되었지만, 아직 명예만큼은 남아 있어 히데요시가 자신의 핏줄에 관한 컴플렉스를 그의 조카가 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도 했습니다. 아무튼 오다 노부나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결국 조정과의 관계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해 '정이장군'이나 '태정관', '관백'에서 더 이상 오르지 못했지요. 후에 직접 에도 막부를 만든 이야에스는 이 때부터 수도와 먼 에도에서 자신이 막부의 쇼군이 되는 것을 꿈꾼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