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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슈의 휘몰아치는 혼란, 쿠노헤의 난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슈의 휘몰아치는 혼란, 쿠노헤의 난



 덴쇼19년(1591년) 9월 4일, 이 해의 3월 경에 발발한 '쿠노헤의 난(九戸の乱)'으로 쿠노헤성에서 농성 하고 있던 쿠노헤 마사자네(九戸政実)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장에 포위되어 항복 했습니다.



오늘의 사건이 일어난 난부 가문의 위치



 오다와라 정벌(오다와라 정벌)은 오다와라성 함락(오다와라성 함락)으로 끝났습니다. 이것으로 호조를 멸망시켜 버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여세를 몰아 '슈 정벌'로 향합니다. 정벌이라 해도 실제로 전투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는 오다와라성을 정벌할 때 참가하지 않은 무장의 영지를 참가한 무장에게 수여한 것이었습니다. 다테 마사무네 역시 늦게 참전한데다 히데요시와 친분이 있던 이시나가문을 멸했기 때문에 영지의 대부분을 빼앗깁니다. 여하튼 이런 히데요시의 영토 분배에 의해 불만이 생긴 오슈의 무장들은 곧이어 잇키를 일으킵니다.(카사이, 오사키 잇키)

 

 그 잇키는 서서히 확대해 이윽고, 히데요시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됩니다. 이것은 히데요시에 반대하는 세력이 들고 일어나는 계기가 됩니다. 그 중 하나가 '쿠호네의 란'입니다. 란이 일어나기 조금 전 무츠 북부를 지배하고 있던 전국 다이묘 난부(南部) 가문은 당주 하루마사(晴政)가 병사해, 이시카와 가문 출신의 양자인 노부나오(信直)와 친자식인 하루쓰구(晴継) 사이에 상속자 분쟁이 일어 납니다. 당연히 친자식인 하루쓰구가 후계자가 되었습니다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급사 합니다.(암살이라는 설과 병사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후보가 노부나오와 하루마사의 사위였던 쿠노헤 사네치카(九戸実親)라고 하는 인물 이었습니다.



쿠노헤 마사자네(九戸政実)



 그의 친가인 쿠노헤 가문은 무로마치 시대 이래 난부 가문의 중신이었기에, 강한 발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양자인 노부나오가 뒤를 잇게 됩니다. 그것이 사네치카의 형인 쿠노헤 마사자네(九戸政実)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루쓰구가 병사는 아니고 노부나오에게 암살되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저런 이시카와 가문인 타관 사람에다 범죄자에게 난부 가문이 이어진다면, 차라리 내가 난의 당주가 되겠다!'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난부 노부나오는 오다와라 공격때, 재빨리 참전한 일에 의해 히데요시에게서 극진한 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일어난 것이바로 '오사키, 카사이 잇키'입니다. 노부나오가 히데요시에게서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마사자네 오슈의 불안한 정세를 기회로 판단합니다. 근처의 쿠시비키(櫛引), 쿠지(久慈), 시치노헤(七戸)라고 하는 무장을 회유해, 덴쇼 19년(1591년) 3월, 5천의 군사를 인솔해 군사를 일으킵니다. 노부나오는 오슈의 정세를 읽고 곧 바로 적자 토시나오(利直)와 중신 기타 노부치카(北信愛)을 히데요시에게 파견해 구원 요청을 합니다. 이 통지를 받은 히데요시는 조카 히데츠구를 총지휘관으로 하는 무츠 토벌군을 파견합니다. 



난부 노부나오(南部信直)



 '오사키,  카사이의 잇키'로의 토벌군은 다테 마사무네. '쿠노헤의 란'의 로의 토벌군은 가모 우지사토가 이끌게 됩니다. 이 때, 우지사토가 인솔한 군세는 약 3만으로, 그 이외에도 아사노 나가마사(浅野長政: 히데요시의 의동생), 오오타니 요시쓰구(大谷吉継)에다  데와의 여러 무장도 가세해 엄청난 수를 자랑하게 됩니다. 8월 23일에는, 가모와 아사노의 부대가 쿠노헤측의 아네타이성(姉帯城), 네소리성(根反城)을 점령 해, 마사자네의 본거지 쿠노헤성도 포위합니다. 이 즈음에는 츠가루 타메노부(津軽為信), 카키자키 요시히로(蠣崎慶広)라고 하는 북부의 무장들도 더해져, 무려 총원 6만의 대군에 육박합니다.


 그런데도 마사자네는 철저 항전을 외치고 농성을 계속합니다만, 10배가 넘게 나는 수의 차이를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덴쇼 19년(1591년) 9월 4일, 결국 항전을 체념하고 성문을 열었습니다. 마사자네를 시작으로 란의 주모자, 간부 총원 150명 남짓이 그 자리에서 베어지고, 성의 외곽으로 도망치던 성병은, 히데요시군이 피운 불로, 한 명도 남김없이 전원이 불에 타 숨졌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무로마치때 부터 계속 된 쿠노헤 가문은 멸망 해, 그 영지는 난부 노부나오의 것이 됩니다. 한편, 오사키, 키사이의 잇키는 다테 마사무네가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