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키가하라 전투(8) 쿄고쿠 다카쓰구 회군하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3일, 쿄고쿠 다카쓰구(京極高次)가 거성인 오츠성으로 귀환했습니다.
쿄고쿠 다카쓰구 초상화
7월에 들어가 본격적인 세키가하라가 시작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중진인 마에다 토시이에도 죽어 도요토미 가문 내의 균열(히데요시 유언)이 점차 심해집니다. 그런 가운데, 거두의 죽음으로 따라 오대로중에서도 필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종종의 상경 요청에 응하지 않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에 모반의 혐의를 덮어 씌워 아이즈 정벌을 결행하게 됩니다.(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이렇게 되어 부재중이 된 후시미성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공격을 시작합니다.(후시미성 공방전) 이에 오야마에서 평정을 해, 회군을 결의한 이야에스는 말머리를 돌립니다.(오야마 평정) 서군은 오카이성에(서군, 오카이성에 착진), 동군은 오카자키성에(동군, 오카자키성 착진) 착진해 전쟁의 기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가마쿠라 시대부터 오미주변의 수호를 맡는 명문이었던 쿄고쿠가문은 전국시대에 아자이가에 패배해, 다카쓰구가 가문을 잇는 무렵에는, 완전히 몰락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혼노지의 변(혼노지의 변)에서는 아케치 미쓰히데의 편에 섰고, 시즈가타케(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시바타 가쓰이에에게 의탁했었습니다. 완전히 패배하는 쪽에만 섰었네요. 그런데도 아직 가문이 남아있다니, 어떤 의미로 대단합니다. 쿄고쿠 가문이 아직 건재했던 것은 실은, 누나(혹은 여동생)인 쿄고쿠 다츠코(쿄고쿠 다츠코)가 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미인을 밝히던 히데요시는 그녀를 측실로 맞아들여, 쿄고쿠 가문은 2만 5천석의 영지를 받게 됩니다.
게다가 쿄고쿠 다카쓰구 자신은 아자이 세 자매중 둘째 하츠(죠우코우인)과 결혼하는데, 그녀의 누나인 챠챠(요도도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결혼했고, 동생인 고우(소우겐인)은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결혼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신부의 위광으로 출세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비와호 근처의 물류의 중심지인 오츠성(大津城)을 맡게 됩니다. 이번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다카쓰구는 예전의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는 듯 서군의 편에 서서, 홋코쿠 가도를 통해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오오타니 요시쓰구와 합류할 예정이었지요.
생각보다 동군의 진군은 빨랐습니다오오타니 요시쓰구의 이동로입니다
미쓰나리의 참전요청을 받은 요시쓰구는(요시쓰구 설득) 곧바로 거성인 츠루가성에 귀환해 호쿠리쿠의 여러 장군을 서군에 참전시키고 있었습니다.(요시쓰구의 에츠젠, 카가 설득) 이것을 가로막은 것이, 카가의 마에다 토시나가였습니다. 그를 겨우 무찌를 서군(아사이나와테 전투)에 참전하기 위해 다카쓰구는 홋코쿠 가도를 통해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시쓰구에게서 요청이 옵니다. 그것은 '지금부터, 나는 미노로 향하므로 그쪽으로 와주게'라는 것이었습니다. 기후성이 함락된(기후성 공방전)것을 알게 된 서군은 요시쓰구나 다카쓰구를 그쪽으로 파견해 도쿠가와의 군세가 더 이상 오지 못하게 막으려 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다카쓰구는 처음으로 올바른 선택을 합니다. 군을 반전시켜, 이에야스의 동군에 붙을 결의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주변은 이미 서군이 점령한 곳입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거성인 오츠성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그는 비와호의 북해안의 시오츠(塩津)로 향해, 배를 타고 돌아갑니다. 하지만 이것을 서군이 모를리도 없고, 그의 앞에 위기가 닥쳐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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