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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10) 우에스기의 세키가하라, 하세도우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10) 

우에스기의 세키가하라, 하세도우 전투




 게이쵸5년(1600년) 9월 9일, 나오에 키네츠구가, 모가미령의 침공을 개시해, 거성 요네자와성(米沢城)에서 출진했습니다.



나오에 키네츠구



 7월에 들어가 본격적인 세키가하라가 시작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중진인 마에다 토시이에도 죽어 도요토미 가문 의 균열(히데요시 유언)이 점차 심해집니다. 그런 가운데, 거두의 죽음으로 따라 오대로중에서도 필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종종의 상경 요청에 응하지 않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에 모반의 혐의를 덮어 씌워 아이즈 정벌을 결행하게 됩니다.(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이렇게 되어 부재중이 된 후시미성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공격을 시작합니다.(후시미성 공방전)  이에 오야마에서 평정을 해, 회군을 결의한 이야에스는 말머리를 돌립니다.(오야마 평정


 이에 나오에 키네츠구는 추격을 진언하나,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겐신공은 적의 후미를 쫓지 않았다.'며 추격을 불허합니다.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아무튼 키네츠구는 이번에는 모가미령으로 진군을 개시합니다. 아이즈 정벌에 다테 마사무네를 비롯한 토호쿠의 무장들은 우에스기를 토벌하러 모였었습니다. 하지만 이야에스가 돌아간 일로 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의 거성 야마가타성에 집결하고 있던 난부 토시나오(南部利直), 도자와 마사모리(戸沢政盛), 아키타 사네스에(秋田実季)는 각각의 거성에 돌아가 버립니다. 다테 마사무네 조차 아이즈 정벌을 이야에스 없이 하는 것은 무리라 생각해 빼앗은지 얼마 안된 시라이시성(白石城)을 철퇴해 우에스기와 화목을 맺습니다.


 모가미 요시아키는 단독으로 120만석의 아이즈를 지배하는 우에스기를 상대로 싸우게 된 것입니다. 8월 18일 요시아키는, 적자 요시야스(義康)을 인질로 내어, 거의 무조건 항복이라고 할 수 있는 조건으로 강화를 겁니다. 하지만 이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황을 보고 행동을 하려는 모가미의 시간끌기입니다. 이를 간파한 키네츠구는 9월 3일 모가미 공격을 개시합니다.


 이렇게 해서 게이쵸5년(1600년) 9월 9일, 키네츠구는 2만 4,000남짓의 군사를 인솔하고, 거성 요네자와성을 출진합니다. 동시에, 요이타중(与板衆)인 키무라 치카모리(木村親盛)과 나카야마성(中山城)을 맡고 있던 요코타 무네토시(横田旨俊)가 인솔하는 별동대가 타카시마성(高島城)을 출진합니다. 키네츠구 본대는 하타나성(畑谷城)에, 별동대는 카미야마성(上山城)으로 향합니다. 비교적 방비가 낮은 주위의 지성을 점령한 키네츠구 군세는 서서히, 요시아키카 있는 야마가타성에의 포위를 시작합니다. 우에스기령의 쇼나이(庄内)에서는 사카타성(酒田城主) 성주 시다 요시히데(志駄義秀)가 모가미가와(最上川)을 따라서, 오우라성(尾浦城) 성주 시모 요시타다(下吉忠)가 육십리가도(六十里街道)를 넘어 모가미령으로 향합니다.



하세도우 전투 개요도



 9월 13일 우에스기의 대군세를 앞에 두고, 불과 350명의 군사가 지키는 하타다니성에 요시아키는 성주 에구치 아키키요(江口光清)에 철퇴 명령을 내립니다만, 아키키요는 농성을 결행합니다. 거기서, 키네츠구가 성의 남쪽에 위치하는 카타쿠라산(片倉山)을 점거하고, 맞은편에 총포대를 배치해, 양쪽에서 동시 공격을 하자 금새 성은 함락되었습니다. 그 후도, 야치성(谷地城),사가에성(寒河江城), 시로이와성(白岩城)등을 차례차례로 점령해,모가미의 영지의 반은 우에스기의 것이 됩니다.


 서쪽에서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있던 운명의 9월 15일, 모가미의 지성 중에서는 가장 견고한 하세도우성(長谷堂城)으로 진군합니다. 다만, 카미야마성으로 향한 별동대 2,000남짓은 성병과 복병의 협격을 당해 고전해, 16일에는, 키무라 치카모리가 전사 해, 요코타 무네토시가 나카야마성으로 도망갔기 때문에 이쪽은 참패가 되었습니다. 이제 키네츠구는 하세도우성을 점령하고, 모가미를 멸망시키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