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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이나바야마 공방전(2) 노부나가, 천하로의 제일보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이나바야마 공방전(2) 노부나가, 천하로의 제일보



 에이로쿠10년(1567년) 오다 노부나가의 침공을 받고 있던 사이토가의 거점성 이나바야마성이 함락 됐습니다. 


 미노의 중신인 미노 삼인중을 설득한 오다 노부나가는 이나바산 밑의 이노쿠치성(井ノ口城) 밑에 불을 질러, 이나바산 공략의 봉화를 들었습니다.(이나바야마성 공방전) 미노 삼인중을 포함한 오다군은 총원 1만 5천, 한편 사이토군의 상세한 수는 불명하지만 이보다는 적었을 것 같습니다. 사이토군은 성의 방어력을 살려, 저항합니다. 하지만 미리 군사를 분산해 배치하고 있던 일이 오히려 치명적으로 작용해 버립니다. 노부나가는 사방으로 시시가키(鹿垣・목책)을 쌓아 올리고 산을 둘러싸, 성과 외부의 연락을 차단하는 '포위작전(取り籠め)'을 결행하면서, 서서히 공격을 개시합니다.


이나바야마성 공방전 전개도


 정면의 능선에 있는 꼬불꼬불한 길에는 미노 삼인중을 포함한 구 사이토가의 가신들이 노부나가 본대와 진군하고,  성의 방비의 요충지인 즈이류우지(瑞龍寺)입구에서는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와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信盛)가 함께 쳐들어갑니다. 에이로쿠10년(1567년) 노부나가의 총공격을 반달간 참은 견고한 이나바야마성도 결국 함락됩니다. 이때 험한 산길을 소수의 정예만으로 올라 게릴라전을 펼쳐 적을 혼란시켜 눈에 띄는 무공을 얻은것이 바로 기노시타 도키치로(下藤吉郎)입니다. 이는 스노마타의 하룻밤에 성을 세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화와 같은 창작이라는 설이 지배적입니다.  어쨌든, 이 일련의 이나바야마성의 공략에 대해 그가 상당한 역할을 한 일은 확실합니다. 


 도산의 죽음으로부터(니가라가와 전투) 11년 동안 비원이었던 이나바야마성을 공략해, 요시오키를 추방한 노부나가는, 이노쿠치(井ノ口)로 불리고 있던 이 지역의 이름을 기후(岐阜)로 고칩니다. 그 이름의 유래는 노부나가의 측근이었던 승려 타쿠겐(沢彦)이  고대 중국의 주왕조의 문왕이 은나라 왕조를 넘어뜨렸을 때에 군사를 일으킨 지명 '기산'의 '기'와 공자가 탄생한 땅 '곡부(曲阜)'의 '부'를 취한 것이라고합니다. 이나바야마성도 기후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을 증축해, 가후성은 한층 더 난공불락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기후성에서 천하를 잡으러 가는 노부나가와 코후쿠지를 탈출한 막부의 후계 아시카가 요시아키(아시카가 요시아키 탈출)가 만나는 것은 이 다음 해 에이로쿠 11년(1568년)의 일입니다. 한편 요시요키는 일단 이세로 피난해 나가시마의 잇코우잇키에 동조한 뒤, 오미의 아사이 나가마사(浅井長政)에게서 떠나 에츠젠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의 곁으로 몸을 의지하고 있던 중, 덴쇼 원년(1573년), 노부나가의 에츠젠 정벌 중 가장 격전이 된 토제자가(刀禰坂)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