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다케다 신겐의 적남 요시노부의 할복
에이로쿠10년(1567) 아버지 다케다 신겐에 의해서 유폐 되고 있던 적남 요시노부가 할복 했습니다.
다케다 요시노부
텐분7년(1538년)에, 가이의 다케다 신겐의 장남으로 정실 산죠노가타와의 사이에 태어난 타케다 요시노부(武田義信)는 아버지의 애정을 받으며 자랍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노부토라를 쫓아낸 일의 반작용인지, 자신의 아들에 대해서는 무한한 애정을 쏟은 것 같습니다. 텐분 21년(1552년) 요시노부가 15세 때 스루가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딸과 결혼했을 때에는 거국적으로 축하했고 다음 해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 이름의 한 글자를 받아 요시노부라 자칭했을 때에도 매우 기뻐해 집까지 신축해 버렸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 다음 해에는 앞의 이마가와에 사가미의 호조씨를 가세한 키요스 삼국 동맹이 이뤄져 신겐은 시나노의 공략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같은 해에 요시노부도 첫 출진을 장식해 이때까지는 누구도 요시노부를 신겐의 후계자로 의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전설적인 4차 하치만바라전투
그러나, 에이로쿠 3년(1560년) 요시노부의 운명을 바꾸는 큰 사건이 일어납니다. 동해도 제일궁이라 불리는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와리의 신흥 세력에 지나지 않았던 오다 노부나가와의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토벌되고 맙니다.(오케하자마 전투) 게다가 그 다음 해 에이로쿠4년(1561년) 그 숙명의 라이벌 에치고의 우에스기 겐신과의 충돌, 가와나카지마의 전투(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가 있었습니다.
이 때 전략이 실패한 신겐, 여기서 최초의 부자의 균열이 생겼다고 합니다. 싸움의 한중간 상처를 입으면서도 분전 해 무공을 높인 요시노부였지만 전후에 '이 즈음에서 끝내자'라는 신겐과 '철퇴하는 우에스기세를 추격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요시노부와의 사이에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이 제4차의 전투에서 신겐은 그 오른팔이인 동생 노부시게(信繁)와 명참모 야마모토 간스케, 그리고 많은 가신을 잃었기에, 전열을 정비해야 하는 것이 선결과제였지만 그 아들은 혈기에 추격을 해야 한다고 했지요. 「고요군감」에 의하면 요시노부는 '머리가 어설프게 좋아 위해 억지를 쓴다'고 했습니다. 다케다 신겐이 너무 응성을 받아 준 까닭인지 의견을 쉽게 바꾸지 않는 성격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장에서 대장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과연 좋지 못하지요.
게다가 그 다음 해 신겐은 사남의 가쓰요리(勝頼)에 가신단의 일부를 맡겨 신슈(信州) 타카토요성(高遠城)의 성주로 합니다. 요시노부는 이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요. 카츠요리의 어머니는 신겐이 멸한 스와의 딸 스와고료닌(스와고료닌)이지요. 심지어 가쓰요리는 그 스와가의 옛 영토를 잇기 위해 '스와'라 자칭하고 있었던 정도이기 때문에 본래 타카토요성을 맡아도 성주가 되어도 문제는 없고, 다케다를 이어야할 적자인 요시노부가 신경써야 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불만을 가지기 시작한 요시노부에게 이 일은 못마땅했습니다.
스와고료닌의 아들 가쓰요리
자신은 전장에서 군공을 세웠는데, 아무런 공이 없는 동생이 성주가 되다니! 라고 분노했지요. 게다가 이마가와로 침공을 시작하자 이 균열은 더 커집니다. 요시노부의 부인은 이마가와의 사람인 레이쇼우인(레이쇼우인) 이였기 때문에 요시노부의 입장에서 이 일은 더욱 더 못마땅했습니다. 마침내 에이로쿠7년(1564년) 요시노부는, 모리야쿠(傳役)의 오부 토라마사(飯富虎昌)등과 아버지 신겐에의 배반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사전에 발각되어 신겐은 요시노부의 측근을 처형하고 가신단은 추방한 뒤, 요시노부를 고후의 토우코우지에 유폐 했습니다. 게다가 요시노부의 부인인 이마가와가의 공주와 이혼시키고 그녀를 스루가에 돌려보내 이마가와와 결별합니다.
한편, 가쓰요리를 노부나가의 양녀와 혼인시켜, 오다와의 우호 관계를 쌓아 올리고 순조롭게 스루가 공격의 준비를 합니다. 후계자가 되는 것은 좌절되고 토가이 제일의 미인인 사랑하는 부인과 떨어져 실의에 빠진 요시노부는, 에이로쿠10년(1567) 스스로의 인생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신겐이 스루가에 침공하고 1년 2개월 후의 일이었습니다. 상기의 일은 모두 「고요군감」에 적혀있는 것으로, 이 책은 아시다시피 신겐을 과하게 칭송해 주는 책이라, 실제로 요시노부가 이정도로 막장이었는가? 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는 있습니다.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간극이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다케다의 미와 신사
봉납된 갑옷
다케다가와 인연이 깊은 미와 신사(美和神社)에 산죠노가타가 갑옷을 봉납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신사의 기록에 '신겐의 갑옷'이라 되어있어 보통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만, 최근 연구에 의하면 아마 요시노부가 성인식 때 입었던 갑옷이라는 것이 정설이 되고 있습니다. 산죠노가타는 자식과 아버지의 불화에 슬퍼해, 아들이 성인식때 입은 갑옷을 봉납하고, 늘 기도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런 어머니의 마음은 모른채 스스로의 슬픔에 빠져 목숨을 끊은 요시노부의 모습은 안쓰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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