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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페이 전쟁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후지와라노 야스히라가 가신에게 살해되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후지와라노 야스히라가 가신에게 살해되다 분지 5년(1189년) 9월 3일, 후지와라노 야스히라(藤原泰衡)가 살해되어 영화를 자랑한 오슈 후지와라가 멸망 했습니다. 겐페이 쟁란에서 중립을 고수했던 오슈 후지와라 가문의 영지는 원래 미나모토 가문의 땅이었기에, 요리토모는 이것을 되찾으려 했습니다. 이에 후지와라노 히데히라는 요시츠네를 받아들여 요리토모를 견제하려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 버립니다. 그리고 뒤를 이은 후지와로노 야스히라는 그 평판이 갈리기는 합니다만, 오슈 후지와라 가문은 결국 요시츠네를 죽이고 그 목을 요시토모에게 보냅니다. 하지만 이도 허무하게 얼마 지나지 않아 요리토모는 '야스히라 추토의 선지'를 받아(야스히라 추토의 선지) 오슈 정벌을 시작합니다.(오..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8) 아츠하지산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18) 아츠하지산 전투 분지 5년(1189년) 8월 10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의 오슈 원정군이 아츠하지산 전투(阿津賀志山の戦い)에서 후지와라노 야스히라(藤原泰衡)군을 격파했습니다. 분지 3년(1187년) 히데히라가 죽어 오슈 후지와라가 쇠락해 가자, 분지 4년(1188년) 2월 21일 재차 요리토모에게 '요시츠네 추토의 선지'를 요구했습니다. 이에 선지가 내려져 오슈 후지와라 가문은 갈등에 휩싸입니다. 구심점이 없어져 쇠락한 오슈 후지와라 가문은 '계속 요시츠네를 보호하자'라는 파와 '덴노의 명을 받아 요시츠네를 토벌하자는 파'가 나뉘었습니다. 결국 히데히라를 이은 야스히라는 반대파인 남동생을 죽이고 요시츠네 토벌의 선지를 받들어 코모로가와 근처의 그의 집에..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요리토모, 야스히라 추토의 선지를 요구하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요리토모, 야스히라 추토의 선지를 요구하다 분지 5년(1189) 6월 25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야스히라 추토의 선지'를 요구했습니다. 선지는 덴노 혹은 거기에 준하는 사람의 명령서입니다. 선지가 있으면 그 행위는 정통으로 관군으로 간주해지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던지 상대를 죽이던지 죄를 추궁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요리토모는 후지와라노 야스히라(藤原泰衡) 추토의 선지를 유구합니다. 오슈 후지와라 가문이 지배하는 오슈는 원래 미나모토의 영지로 '후 삼년의 역'으로 빼았긴 땅입니다. 이제 그는 이 땅을 되찾으려 합니다. 교토로 들어와 타이라를 토벌한 요시츠네와 요리토모의 갈등이 생겨납니다. 요시츠네는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요리토모 추토의 선지'를 요구해, 이를 받..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7) 코모로가와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17) 코모로가와 전투 분지 5년(1189년) 4월 30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의 요청을 받은 후지와라노 야스히라(藤原泰衡)가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의 코로모가와(衣川) 저택을 덮쳐, 요시츠네를 할복시킨 '코모로가와 전투(衣川の合戦)'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무공을 세워 단노우라 전투에서 타이라 가문을 물리쳤던 것도 잠시(단노우라 전투), 형 요시토모와의 불화로 쫓기는 몸이 된 요시츠네는 시고쿠와 큐슈를 지배에 넣어 형과 맞서려 하나 태풍을 만나 실패하고 맙니다.(요시츠네 교토 탈출) 이에 그는 분지 3년(1187년) 2월 10일 오슈 히라이즈미(平泉)의 후지와라노 히데히라(藤原秀衡)에게로 도망쳤습니다.(히데히라에게 의탁하다) 하지만 8개월 뒤 히데히라가 ..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요시츠네 교토를 빠져 나가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요시츠네 교토를 빠져 나가다 분지 원년(1185년) 11월 3일,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교토에서 빠져 나갔습니다. 한때는 타이라 토벌을 결의했던 형제는 동생이 지나치게 많은 전공을 세우고, 고시라카와 법황에서 관직을 멋대로 받으며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단노우라 전투(단노우라 전투)의 개선이 막혀, 교토로 들어가 있던 그에게 형 요리토모는 호리카와 야습(호리카와 야습)을 통해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실패하고, 요리토모는 신부 마사코의 아버지인 호조 도키마사(北条時政)가 총대장이 되어 요시츠네 토벌군이 가마쿠라를 출발했습니다. 이 소식은 교토에 넓게 퍼집니다. 그런 가운데, 11월 1일에 요시츠네는은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시코쿠와 큐슈를 맡겨달라'고 신청합니다. 단노우라에..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요시츠네 위기, 호리카와 야습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요시츠네 위기, 호리카와 야습 분지 원년(1185년) 10월 11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의 명령을 받은 토사 호우슌(土佐坊昌)이, 로쿠죠호리카와(六条堀川)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의 저택을 야습했습니다. 단노우라에서 타이라를 물리쳐(단노우라 전투), 기세등등하게 형 요리토모가 있는 카마쿠라에 전승 보고로 향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는 형의 허가를 얻지 않은 채로 마음대로 조정으로부터 관위를 받은 것으로 형의 분노를 사, 코시고에(腰越)에서 금족 되어 가마쿠라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교토로 돌아온 요시츠네는 '가마쿠라에 불만 있는 사람은 나에게 와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는 교토로 들어가자 마자 이요노카미(伊予守)로 제수받았고, 숙부 미나모토노 유키이에..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야시마 전투(2) 사토 츠구노부 전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야시마 전투(2) 사토 츠구노부 전사 분지 원년(칸랴쿠 4년 1185년) 2월 19일은, 겐페이 쟁란 굴지의 전투 '야시마 전투'가 있던 날입니다. 형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무가들을 통솔하는 겐지의 동량이기에, 조직의 견고함을 위해 자신의 허락 없이 관위를 받거나 승진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시라카와 법황은 그와 상의를 하지 않고 독단으로 요시츠네에게 관위를 제수해 갈등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동생이라고 봐주면 기강이 헤이해 지지요. 즉시 요리토모는 요시츠네를 토벌군의 대장에서 제외해 다른 동생인 노리요리(範頼)를 서쪽으로 향하게 합니다. 한편, 타이라 가문은 이치죠다니에서 패배해 시고쿠의 야시마로 도망쳐, 제 81대 안토쿠덴노(安徳天皇)를 즉위시킵니다. 9월에는 .. 더보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야시마 전투(1)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야시마 출항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야시마 전투(1)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야시마 출항 분지 원년(1185년) 2월 16일 미나모토군의 대장에 복귀해, 타이라 토벌을 목표로 하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불과 하룻밤에 배로 바다를 건너, 타이라가 진을 치는 야시마로 향했습니다. 히요도리고에 기습(히요도리고에 기습)을 성공시켜, 승리를 거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가 교토에 개선 한 것은, 전투로부터 2일 후의 캰라쿠 3년(1184년) 2월 9일의 일이었습니다. 이미 교토에서는 이치죠다니 전투의 결과가 도착해 있었는지 교토에서 들어온 키소노 요시나카가 영화가 다한 타이라에 승리했을 때의 대환성에 이은 환성이 울려 퍼집니다. 이 때, 요시츠네은 아직 26세입니다. 자신을 우러러보는 교토 백성들에게 우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이치노타니 전투(3) 아오바의 피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이치노타니 전투(3) 아오바의 피리 칸랴쿠 3년(1184년) 2월 7일은, 겐페이 전투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이치노타니(一の谷) 전투'가 있던 날입니다. 작년인 칸랴쿠 2년(1183년), 파죽지세로 서쪽으로 진군한 키소노 요시나카의 군사에 경을 쫓겨 서해로 교토를 빠져나간 타이라 가문이었습니다.(교토 탈출) 하지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요시나카의 대립으로 겐지가 둘로 나뉘어져 있는 동안에, 야시마(屋島)에서 조금 돌아와 일찍이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한때 수도로 정했던 후쿠하라(福原)에 있었습니다. 미나모토 가문 내부의 갈등은 아와즈 전투에서 요시나카가 죽으며 끝나는 듯 했습니다.(아와즈 전투) 이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목표는 다름아닌 타이라 가문입니다. 이에 벌어진 것이 '이.. 더보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이치노타니 전투(2) 타이라노 타다노리 전사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이치노타니 전투(2) 타이라노 타다노리 전사 칸랴쿠 3년(1184년) 2월 7일은, 겐페이 전투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이치노타니(一の谷) 전투'가 있던 날입니다. 작년인 칸랴쿠 2년(1183년), 파죽지세로 서쪽으로 진군한 키소노 요시나카의 군사에 경을 쫓겨 서해로 교토를 빠져나간 타이라 가문이었습니다.(교토 탈출) 하지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요시나카의 대립으로 겐지가 둘로 나뉘어져 있는 동안에, 야시마(屋島)에서 조금 돌아와 일찍이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한때 수도로 정했던 후쿠하라(福原)에 있었습니다. 미나모토 가문 내부의 갈등은 아와즈 전투에서 요시나카가 죽으며 끝나는 듯 했습니다.(아와즈 전투) 이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목표는 다름아닌 타이라 가문입니다. 이에 벌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