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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겐페이 쟁란/역사편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요리토모, 야스히라 추토의 선지를 요구하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요리토모, 야스히라 추토의 선지를 요구하다



 분지 5년(1189) 6월 25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야스히라 추토의 선지'를 요구했습니다. 


 선지는 덴노 혹은 거기에 준하는 사람의 명령서입니다. 선지가 있으면 그 행위는 정통으로 관군으로 간주해지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던지 상대를 죽이던지 죄를 추궁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요리토모는 후지와라노 야스히라(藤原泰衡) 추토의 선지를 유구합니다. 오슈 후지와라 가문이 지배하는 오슈는 원래 미나모토의 영지로 '후 삼년의 역'으로 빼았긴 땅입니다. 이제 그는 이 땅을 되찾으려 합니다.



후지와라노 야스히라



 교토로 들어와 타이라를 토벌한 요시츠네와 요리토모의 갈등이 생겨납니다. 요시츠네는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요리토모 추토의 선지'를 요구해, 이를 받아 이때는 요시츠네가 관군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출병하자마자 태풍으로 큰 손해를 입게 됩니다.(요시츠네 교토 출병) 이를 본 고시라카와 법황은 1주일 뒤에 요리토모의 요구대로 '요시츠네 추토의 선지'를 내립니다. 이에 관군과 역도가 한순간에 바뀌어 그는 오슈의 후지와라노 히데히라(藤原秀衡)를 의지해 도망칩니다. 당시의 오슈국은 거의 반 독립국인 강한 국가였기에, 요리토모도 쉬이 손댈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지 3년(1187년) 히데히라가 죽어 오슈 후지와라가 쇠락해 가자, 분지 4년(1188년) 2월 21일 재차 요리토모에게 '요시츠네 추토의 선지'를 요구했습니다. 이에 선지가 내려져 오슈 후지와라 가문은 갈등에 휩싸입니다. 구심점이 없어져 쇠락한 오슈 후지와라 가문은 '계속 요시츠네를 보호하자'라는 파와 '덴노의 명을 받아 요시츠네를 토벌하자는 파'가 나뉘었습니다. 결국 히데히라를 이은 야스히라는 반대파인 남동생을 죽이고 요시츠네 토벌의 선지를 받들어 코모로가와 근처의 그의 집에서 요시츠네를 죽입니다.(코모로가와 전투)


 그런데  요시츠네 죽음의 불과 2개월 뒤인 분지 5년(1189) 6월 25일, 요리토모는 '야스히라 추토의 상황 선지'를 요구합니다. 이제 전란의 불꽃은 오슈로 넘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