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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센고쿠 다이묘의 출자는 얼마나 중요했는가?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센고쿠 다이묘의 출자는 얼마나 중요했는가? 센고쿠 다이묘는 영지를 유지하고, 군비를 갖추고, 외교를 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출자를 명확히 하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센고쿠 다이묘에는 다양한 출자가 있었습니다.(센고쿠 다이묘의 출자) 고쿠시나 슈고에서 다이묘가 된 경우, 크게 봐서 슈고다이까지는 그래도 출자에 자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토호나 출신이 명확지 않은 경우에는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인지도 몰랐기에 주변국들과 가신들, 더 나아가 영민들의 신망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에 그들은 계도가 계보를 조작하여 혈통의 고귀함을 강조하려 했습니다. 장사치에서 센고쿠 다이묘까지 오른 호조 소운은 자신의 출신을 이세의 세키(関)이며 이세 헤이시(伊勢平)와 동족이었다고 말하고..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최고의 출세, 도요토미 가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최고의 출세, 도요토미 가문 보통 이 가문편에서 소개하는 가문들은 다 뿌리가 깊고 적어도 3대 이상은 간 가문들 입니다. 하지만 전혀 뿌리없이 등장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한 인물에만 포커스가 맞추어진 가문은 도요토미 가문 하나 뿐만이 아닐까합니다. 비천한 신분에서 천하인이 되기까지 토키치로의 아버지인 야에몬(弥右衛門)은 오다 가문의 아시가루 였지만, 화살을 맞아 농민으로 살아갔다고 합니다. 사실 키노시타(木下)라는 성도 야에몬의 대에서 부터 쓰이고 있었다고 하는 사료도 있어, 히데요시가 완전히 농민은 아니고, 반사반농의 토호가 아니었나 하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는 동생이며 평생의 동반자였던 히데나가(秀長)와 함께 오다 노부나가의 산하로 들어가게 됩니다. 노부나가의 신발을 맡..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여름의 진(8) 난공불락의 오사카성 함락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여름의 진(8) 난공불락의 오사카성 함락 게이쵸 20년(1615년) 5월 8일, 오사카성이 불길에 싸여 함락 되어, 도요토미 히데요리, 요도도노 모자가 할복해 여기서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 했고, 겨울과 여름의 두 번에 건넌 '오사카의 진'은 종결했습니다. 어제 정오부터 시작된 오사카 여름의 진의 오사카성 총공격(.오사카성 총공격) 이 때에 사나다 유키무라 군이 마쓰다이라 타다나오(松平忠直)군을 돌파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진에 들어가 '하마터면' 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타다나오도 사나다 보다는 오사카성 공격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마쓰다이라 부대는 쿄우하시구치(京橋口)에서 니노마루(二の丸)로 들어가, 혼마루(本丸)에 제일 먼저 도착했습니다. 도쿠가와 측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1) 오사카성의 군의, 사나다의 비책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1) 오사카성의 군의, 사나다의 비책 게이쵸 19년(1614년) 10월 10일, 사나다유키무라가 오오사카성에 입성해, 오사카성의 군의에 참것했습니다. 다음날인 10월 11일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슨푸에서 출진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움직임을 알게 된 히데요시의 군의가 있었습니다. 사나다 유키무라는 황금 2백매, 은3 백관, 50만석의 영주라고 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오사카성 에 들어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아버지가 남긴 수많은 유산은 있지만, 정작 전투를 할 줄 아는 무장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서군의 무장들은 대부분 죽거나 료닌이 되었었지요. 그래서 오사카 겨울의 진의 전운에 히데요시 은고의 무장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라는 히데요리의 기대와 다르게,..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도요토미 축출의 서막, 호코지 종명사건이 일어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도요토미 축출의 서막, 호코지 종명사건이 일어나다 게이쵸 19년(1614년) 7월 21일, 오사카의 진의 발단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호코지 종명(鐘銘)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게이쵸5년(1600년)의 세키가하라의 전투(세키가하라 전투 발발)의 전후에는, '전투는 어디까지나 도요토미 가문의 내분이며, 도쿠가와 가문이 도요토미 가문을 멸하려는 의도는 없다.'고 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하인 도요토미 가문에 모반을 꾀한 일이 되어, 동군의 무장들도 대부분 적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 이야에스는 도요토미히데요리와 게이쵸 16년(1611년)에 니죠성(二条城)에서 회견했습니다. 그 전후로 왠지,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동군으로 배신했던..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19) 고니시 유키나가, 자수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세키가하라 전투(19) 고니시 유키나가, 자수하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9일,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진 서군에 속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부키산(伊吹山) 속에서 잡혔습니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9일의 일 세키가하라의 촌장 린조우주(林蔵主)가, 이부키산속을 걷고 있저, 약간 먼 곳에서 '여보시오. 이리 와 주시오. '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도망자였습니다. 4일전의 9월 15일, 세키가하라에서 큰 전투가 있어, 근처는 그물 처럼 둘러쳐진 도망 무사 사냥으로 삼엄한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때주위 마을의 태도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도망치는 무사 사냥에 참가해 포상을 받는지, 혹시모를 화를 입지 않기 위해서, 못 본 척을 하는지 입니다. 린조우주..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의 서막 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세키가하라의 서막 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게이쵸 5년(1600년) 4월 1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상경 요청을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거부했습니다. 게이쵸 3년(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히데요시 유언을 남기다)뒤에, 그의 유언 대로 도쿠가와 이야에스를 비롯한 오대로와 이시다 미쓰나를 중심으로 하는 오봉행에 의한 합의제로, 정권이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윽고,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유언을 무시하고 여러 다이묘와 사적으로 혼인 관계를 맺거나 독단으로 마음에 드는 다이묘를 스스로의 파벌에 넣으려고 해서, 오대로와 오봉행의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오대로의 나머지나 오봉행은 종종 연서(連署)를 써 이에야스의 행동을 비난 합니다만, 이에야스는 그것을 무시..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조선과 관계수복의 노력, 포로송환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조선과 관계수복의 노력, 포로송환 게이쵸 5년(1600년) 3월 2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沢広高), 소 요시토시(宗義智)등이 조선에 강화를 요청해, 포로 160명을 송환했습니다. 아마쿠사 제도를 포함한 히고 4군의 영주 고니시유키나가, 나가사키 봉행인 데라자와 히로타카, 대마도 주 소 요시토시의 영지는 모두 조선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후의 처리의 주도를 그들이 하게 되었습니다. 도요토미의 야욕이 낳은 조선 침략은 두 차례에 걸쳐 실패하고, 결국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나(임진왜란 종결) 그 유언에 따라 철퇴하게 됩니다.그리고 일본 내의 정세가 급변해 포로 송환이 이루어진 게이쵸 5년 중에 세키가하라전투가 있기도 했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이야에스가 오사카성에 들어가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이야에스가 오사카성에 들어가다 게이쵸4년(1599년) 9월 27일, 삭발해 교토 산본기(三本木)에 은거한 기타노만도코로(고우다이인)에 대신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성 니시노마루(西ノ丸)에 들어 갔습니다. 게이쵸 3년 (1598년)의 8월 18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 이때까지, 오사카성의 니시노마루에 있던 기타노만도코로(고우다이인)는 삭발해 비구니가 되어, 교토 산본기의 저택으로 옮깁니다. 다음날의 게이쵸4년(1599년) 9월 27일에, 당시 거점으로 하고 있던 후시미성에서 그녀의 빈자리를 채우려 이야에스가 오사카 성의 니시노마루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에 도요토미를 멸하러 이동한 것인가?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히데요시는 유언으로 후시미성에..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이시다 미쓰나리 습격당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이시다 미쓰나리 습격당하다 게이쵸 4년(1599년) 윤 3월 4일, 가토 기요마사등 도요토미가의 가신 7명이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를 습격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를 낳는 도요토미 가문 내의 분쟁은, 히데요시 만년의 무렵부터 그 징조가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 제일의 표적이 된 것은 다름아닌 이시다 미쓰나리였습니다. 그는, 원래 오미의 토호의 아들이었습니다. 덴쇼 2년(1574년), 아직 기노시타 도키치로라 자칭하고 있던 히데요시가 처음으로 주어진 오미의 영지를 순방하고 있었을 때, 처음으로 받은 영지를 지나치게 열심히 보던 그는 지치고 목이 말라 차를 부탁하려고고, 문득 찾아낸 절에 들어갑니다. 차를 부탁한 히데요시에게 어린 승려가 나와, 차를 줍니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단숨에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