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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임진왜란이 종결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임진왜란이 종결하다 게이쵸 3년(1598년) 11월 20일, 끝까지 주둔하던 시마즈 부대가 철퇴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두번째 일으킨 한국 침략 정유재란(게이쵸의 역)이 종결 했습니다. 호조의 오다와라성을 점령해(호조가 멸망), 오슈의 영웅 다테 마사무네를 부하로 삼아(오다와라성에서 히데요시를 만나다) 드디어 천하를 수중에 넣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무모한 조선 침략을 개시합니다. 분로쿠 원년(1592년)부터 분로쿠 2년에 걸친 제1차 한국 침략, 임진왜란(분로쿠의 역)이 휴전한 뒤 강화회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강경한 히데요시는 14만의 대군을 다시 조선에 보내 침략을 개시합니다. 명의 원군뿐만아니라 조선 각지에서 발발하는 의병에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병상의 히데요시, 유언을 남기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병상의 히데요시, 유언을 남기다 게이쵸 3년(1598년) 8월 9일, 병상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마에다 토시이에등을 불러, 히데요리의 장래와 조선에서의 철군을 맡겼습니다. 이 해의 5월 부터 컨디션이 무너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서히 악화되는 병에, 자신의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습니다. 그는 거성인 후시미성(伏見城)에 여러 다이묘를 소집해 나라의 장래나, 아들인 히데요리의 장래에 대해서 여러가지 유언인 듯한 부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게이쵸 3년 8월 9일, 병상의 히데요시는 사방침(팔꿈치를 걸치는 배게)에 의지하면서 일어 납니다. 그 앞의 왼쪽으로는 도쿠가와 이야에스, 마에다 토시이에, 다테 마사무네, 우키타 히데이에가 앉아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모리 데..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히데요시가 영주들에게 충성의 서약을 요구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히데요시가 영주들에게 충성의 서약을 요구하다 게이쵸 3년(1598년) 7월 15일, 와병 중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재 영주에 대해 히데요리에게의 충절을 맹세하는 서약을 요구했습니다. 즉 히데요시는 자신의 사후, 신속하게 아들인 히데요리에게 바톤 터치 할 수 있게, 영주들에게 맹세하게 한 것입니다. 이 1개월 후, 히데요시는 저 세상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2년 후의 게이쵸 5년(1600년)에 세키가하라 전투가 있어, 또 15년 후의 게이쵸 20년(겐나 원년 1615년)에 일어난 '오사카 진'으로 도요토미가는 멸망하게 됩니다. 분카 9년(1812년)에 쓰여진 「폐절록(廃絶録)」과 메이지 24년(1891년) 쓰여진 「도쿠가와제봉록(徳川除封録)」이라고 하는, 도쿠가와시대에 개역 또는 멸..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나가사키 26명 성인의 순교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나가사키 26명 성인의 순교 1597년 2월 5일, 나가사키 니시자카(西坂) 언덕에서 26명의 크리스트교도가 처형된 일에 의해, 오늘 2월 5일은“나가사키 26 성인 순교의 날”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일본의 달력으로 이 날은 게이쵸 원년 12월 19일 입니다. 하지만 그레고리력에 의거해 로마 교황청이 제정한 나가사키 순교일은 1597년 2월 5일이기에, 이 날짜로 서술하도록 하겠습니다. 게이쵸 원년의 6월에 혜성이 나타나고, 7월에 아사마산에서 대분화가 일어나 그 재가 교토와 히데요시가 있는 후시미까지 이릅니다. 게다가 윤 7월(당시 일본의 역법으로는 7월이 두번이었습니다)에는 킨키지방에 대지진이 일어나고 여진이 2주간이나 지속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8월에는 큰 태풍이 상륙..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도요토미 히데츠구 모반죄로 할복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도요토미 히데츠구 모반죄로 할복 분로쿠 4년(1595년) 7월 15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 도요토미 히데츠구가 모반의 죄에 의해 할복해 향년 28세로, 불과 4년간만 관백 자리에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츠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누나인 토모(とも)와 미요시 요시후사(三好吉房) 사이의 장남으로 에이로쿠 11년(1568년)에 태어났습니다. 16세에 히데요시의 가족의 한 명 시즈가타케의 전투(시즈가타케 전투)로 첫 출진이 됩니다. 다음 해의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히데요시를 설득해 스스로가 총대장이 되어 도전합니다만, 이야에스에게 참패하고 맙니다.(나가쿠데 전투) 히데요시의 조카이기에 직위를 얻었다는 오명을 벗어내고 싶었던 그는 오히려 오명을 거듭해 버렸습니다. 18세가 된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연표; 히데요시와 이야에스, 무로마치 후기 모모야마 시대 일본 전국시대 연표; 히데요시와 이야에스, 무로마치 후기 모모야마 시대 이전시대: 오다노부나가의 무대, 무로마치 후기 아즈치 시대 혼노지의 변으로 쓰러진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히데요시가 '도요토미'의 성을 받고 태정관에 오른 것에서 부터 도쿠가와 이야에스가 에도 막부를 세워 전국시대를 종식시킬 때 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참고로 일본에서 '분로쿠, 게이쵸의 역'이라 부르는 임진왜란은 다들 잘 아실거라 생각해 서술하지 않으려 합니다. 연호 년도 일자 사건 덴쇼 1586년 12월 19일 히데요시, 도요토미의 성을 받고 태정관에 오르다 1587년 3월 8일 츠루사키성 공방전(2) 묘우린니의 츠루사키성 탈환 4월 17일 시마즈 요시히사 배수의 진 타카성,네지로자카 전투 6월 19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크리..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임진왜란 서막의 불협화음, 우메키타의 란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임진왜란 서막의 불협화음, 우메키타의 란 분로쿠 원년(1592년) 6월 15일, 사츠마 유노오(湯之尾)의 지도우(地頭) 우메키타 쿠니카네(梅北国兼)가 사시키성(佐敷城)을 습격해 빼앗았습니다. 우메키타의 란, 혹은 우메키타 잇키로 불리는 임진왜란 중에 일어난 반란입니다. 먼저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쵸의 역 이라고 부른는 임진왜란은 조선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또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나중에 연표에 사건만 표시하고 지나가고, 기회가 된다면 따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 임진왜란 기간에 일본에 있었던 사건 위주로 서술하려 합니다. 분로쿠 원년(1592년) 4월 13일,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히젠 나고야성(名護屋城)에 거점을 두고, 차례 차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슈의 휘몰아치는 혼란, 쿠노헤의 난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슈의 휘몰아치는 혼란, 쿠노헤의 난 덴쇼19년(1591년) 9월 4일, 이 해의 3월 경에 발발한 '쿠노헤의 난(九戸の乱)'으로 쿠노헤성에서 농성 하고 있던 쿠노헤 마사자네(九戸政実)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장에 포위되어 항복 했습니다. 오다와라 정벌(오다와라 정벌)은 오다와라성 함락(오다와라성 함락)으로 끝났습니다. 이것으로 호조를 멸망시켜 버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여세를 몰아 '오슈 정벌'로 향합니다. 정벌이라 해도 실제로 전투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는 오다와라성을 정벌할 때 참가하지 않은 무장의 영지를 참가한 무장에게 수여한 것이었습니다. 다테 마사무네 역시 늦게 참전한데다 히데요시와 친분이 있던 이시나가문을 멸했기 때문에 영지의 대부분을 빼앗깁니다. 여하튼 이런..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다테 마사무네, 오슈 발발 잇키의 변명에 성공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다테 마사무네, 오슈 발발 잇키의 변명에 성공하다 덴쇼 19년(1591년) 2월 4일, 앞의 카사이, 오사키 잇키의 주모자라고 의심된 다테 마사무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서 변명하기 위해 상경했습니다. 외눈의 영웅 다테 마사무네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덴쇼 18년(1590년) 7월에 오다와라성을 점령해, 관동에 군림한 호조를 멸망시켜(호조 멸망), 확실히 천하를 수중에 넣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 기세로, 오슈 정벌을 합니다. 그것은 전투라고 하는 것보다 오다와라성 공격때 참전하지 않았던 사람을 처분하고, 참전한 사람을 우대 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영지가 몰수된 토호쿠의 무장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남북조대부터 오슈를 지배하는 명문..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다테 마사무네, 히데요시를 배반? 카사이, 오사키 잇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다테 마사무네, 히데요시를 배반? 카사이, 오사키 잇키 덴쇼 18년(1590년) 11월 2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 정벌에 반발해 10월 무렵에 발발하고 있던 카사이(葛西), 오사키(大崎) 잇키로, 잇키 세력에 포위되어 고립상태로 농성하던 사누마성(佐沼城)의 키무라 요시키요(木村吉清), 키요히사(清久) 부자가 구출되었습니다. 덴쇼 18년(1590년)의 3월 말, 호조의 오다와라성 정벌에(오다와라 정벌 시작)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산하에 들어오지 않은 토호쿠의 여러 무장에게, 오다와라 공격에 참전하도록 명령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3개월에 걸치는 싸움의 끝인 7월 5일에 오다와라성이 함락 된 후 호조 우지마사가 할복, 아들 우지나오가 코노야마에 들어가, 사실상 호조는 멸망..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