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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9) 쿄고쿠 가문의 세키가하라 오츠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세키가하라 전투(9) 쿄고쿠 가문의 세키가하라 오츠성 공방전 게이쵸5년(1600년) 9월 7일, 쿄고쿠 다카쓰구(京極高次)가 농성하는 오츠성(大津城)을 둘러싼 서군의 여러 무장이 오츠성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7월에 들어가 본격적인 세키가하라가 시작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중진인 마에다 토시이에도 죽어 도요토미 가문 내의 균열(히데요시 유언)이 점차 심해집니다. 그런 가운데, 거두의 죽음으로 따라 오대로중에서도 필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종종의 상경 요청에 응하지 않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에 모반의 혐의를 덮어 씌워 아이즈 정벌을 결행하게 됩니다.(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이렇게 되어 부재중이 된 후시미성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공격을 시작합니다.(후시미성 공방전) 이에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센고쿠 다이묘의 출자는 얼마나 중요했는가?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센고쿠 다이묘의 출자는 얼마나 중요했는가? 센고쿠 다이묘는 영지를 유지하고, 군비를 갖추고, 외교를 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출자를 명확히 하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센고쿠 다이묘에는 다양한 출자가 있었습니다.(센고쿠 다이묘의 출자) 고쿠시나 슈고에서 다이묘가 된 경우, 크게 봐서 슈고다이까지는 그래도 출자에 자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토호나 출신이 명확지 않은 경우에는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인지도 몰랐기에 주변국들과 가신들, 더 나아가 영민들의 신망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에 그들은 계도가 계보를 조작하여 혈통의 고귀함을 강조하려 했습니다. 장사치에서 센고쿠 다이묘까지 오른 호조 소운은 자신의 출신을 이세의 세키(関)이며 이세 헤이시(伊勢平)와 동족이었다고 말하고..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전국의 패왕, 오다 가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전국의 패왕, 오다 가문 일본 전국시대의 주역 중 하나가 바로 오다 가문입니다. 전국시대는 잘 몰라도 오다 노부나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수없이 많지요. 그런 오다가문의 파란 만장한 역사를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오다 가문의 기원 보통 오다 가문은 타이라(平) 가문의 후계로 여겨집니다. 타이라 가문은 덴노 가문의 분가로, 헤이안 말기 미나토모노(源)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의 명가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내쫓고 권세를 차지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라는게 정설이고, 실제로는 후지와라(藤原) 가문의 혈통일 것입니다. 노부나가의 기틀을 마련하다, 오다 노부히데 오다 노부히데(信秀)는 노부나가의 아버지입니다. 위에 거창하게 써놓기는 했지만 당시 노부히데의..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정치편; 무사에 대한 보상(2) 칸죠(感状) 일본 전국시대 정치편;무사에 대한 보상(2) 칸죠(感状)와 관위(官位) 저번에 지행(지행)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그렇지만 토지가 한정되어 있는 이상, 다른 포상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것은 금이거나 무기나 방어구, 재보등의 '물건'이 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밖에 '칸죠'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감사장' 또는 '상장'입니다. 전투의 활약등에 대한 다이묘의 감사와 격려의 말이 쓰여져 있는 서신으로, 이것을 받는 일은 명예를 존중하는 무사로서는 큰 훈장이 되었습니다. 그래봐야 종이 쪼가리이므로, 결국에는 지행을 받는것이 선호되기는 하였습니다. 그 밖에 '관위(官位)'라고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조정(덴노)에게서 주어지는 공가(公家)로서의 '공식적인 신분'이며, 막부나 조..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아시카가 요시아키, 쇼군이 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아시카가 요시아키, 쇼군이 되다 에이로쿠 11년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의 조력으로 종4위에 제수되고, 결국 제 15대 쇼군이 되었습니다. 13대 쇼군 요시테루가 히사히데와 미요시 삼인중에게 암살 당한 후에, 요시아키는 환속해 쇼군이 되려 합니다. 한편, 미노의 사이토 세력을 몰아낸 오다 또한 천하를 쥐기 위해 상경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양자의 이해관계가 일치해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의 상경을 도왔습니다. 그의 앞길을 막는 롯카쿠가를 단 3일로 격파하고 수도로 들어간 그는 미요시 3인중 마저 내쫓아 버립니다. 재밌는 것은 이 일련의 전투에서 전에 미노의 세력 즉, 도산의 가신이었던 이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최전선에 슬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5) 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5)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게이쵸 19년(1614년) 11월 29일, 오오사카동의 진의 야전, 바쿠로우가후치(伯労淵), 노다(野田), 후쿠시마(福島) 전투가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기부한 호코지 종명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트집을 잡은 것이 게이쵸 19년(1614년) 7월 21일(호코지 종명사건) 이야에스가 무리한 조건을 내고 도요토미 측에 최후 통고를 낸 것이 8월 20일(기타기리 가쓰모토, 중재실패) 입니다. 이윽고, 결전을 각오한 오사카측의 요청에 따라 사나다 유키무라가 쿠도산을 탈출해(쿠도산을 탈출하다), 오사카성에서는 군의가 열립니다. 사나다 유키무라뿐만 아니라 교토에서 거지로 영락한 고토 모토츠구(後藤基次)나, 서당의 선생님으로 생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미츠세의 변, 명문 기타바타케의 최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미츠세의 변, 명문 기타바타케의 최후 덴쇼 4년(1576년, 오다 노부나가의 뜻을 받은 후지카타 토모나리(藤方朝成), 쓰게사부로 자에몬(柘植三郎左衛門), 다키가와 카츠토시(滝川雄利) 등이, 키타바타케 토모노리(北畠具教)를 이세 미츠세관(三瀬館)에 덮쳐 살해했습니다. 키타바타케 토모노리는 이세국 키타바타케가의 8대 당주 입니다. 아시는 바, 고다이고덴노(後醍醐天皇)의 겐무의 신정(建武の新政)을 지지해 남조의 군사를 이끈 키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의 자손입니다. 지카후사의 삼남 아키요시(顕能)가 이세국의 영주가 된 일로부터, 이세 일대에 독자적인 세력을 자랑하게 된 무라카미 겐지의 유파를 이어받는 명문입니다. 텐몬 22년(1553년)에 아버지의 은거로 뒤를 이은 토모노리는 이미 이세..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다의 수군, 모리 수군에 참패하다 키즈가와구 해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다의 수군, 모리 수군에 참패하다 키즈가와구 해전 덴쇼 4년(1576년)11, 10년에 걸친 오다 노부나가와 이시야마 혼간지의 전투 중 '제1차 키즈가와구 해전(第一次木津川口海戦)'이 전개되었습니다. 천하 통일을 목표로 하는 오다 노부나가와 종교에 의한 단결로 권력에 지배되지 않는 자유 도시를 운영하는 혼간지의 대립은 마침내, 겐키 원년(1570년) 오사카 이시야마혼간지의 법주 캔뇨가 전국의 혼간지 문도에게 한 요청에 의해서 이시야마 전투로 격화됩니다. 이 도중 노부나가에 의해 쇼군의 권력을 잃은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요청에 응해 이시야마 혼간지에 다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겐신, 아사쿠라 요시카게, 아자이 나가마사등에 의한 노부나가 포위망이 깔리게 됩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하나 하..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노부나가를 패퇴시킨 사이가중, 단가가와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노부나가를 패퇴시킨 사이가중, 단가가와 전투 덴쇼 5년(1577년) 오다 노부나가가 사이가 공격을 개시하자, 스즈키 마고이치(鈴木孫一)가 그에 맞서 싸웠습니다. 10년 이상이나 오다 노부나가와 항전을 계속한 제11대 법주 켄뇨를 중심으로 하는 이시야마혼간지의 근본에는 '싸워 서 죽으면 극락 왕생할 수 있다' 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 열광적인 신도에 의한, 죽음도 불사하는 병사들과 거기에 협력한 무장 집단의 존재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모리의 무라카미 수군이 제1차 키즈가와구 해전에서 노부나가를 격퇴하지요. 한편, 그런 수군과 함께 혼간지를 지지한 것이, 사이가중이 대량의 총과 사격 기술이었습니다. 사이가중은 기노카와 하류 지역에 사는 토착의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당시의 기슈(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다 노부나가와 이시야마 혼간지 격돌! 텐노지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다 노부나가와 이시야마 혼간지 격돌! 텐노지 전투 덴쇼 4년(1576년) 이시야마혼간지를 포위한 오다 노부나가 군의 성채를 둘러싼 격렬한 공방전인 텐노지 전투가 전개되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와 결별한 제15대 무로마치 막부 쇼군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요청으로, 아자이 나가마사, 아사쿠라 요시카게, 다케다 신겐등의 무장에 의해서 형성 된 노부나가 포위망에는 제11대 혼간지 법주 켄뇨(顕如)가 더해져, 전국에 잇코우 잇키를 일으키며 오다를 적대하고 있었습니다. 현재의 오사카성 위치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이시야마 혼간지는 이런 잇코우 잇키의 중심이 되는 장소였습니다. 그런 혼간지와 노부나가와의 전투인 이시야마 전투는, 겐키 원년(1570년)부터 덴쇼 8년(1580년)까지 11년에 걸쳐서 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