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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노부나가를 패퇴시킨 사이가중, 단가가와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노부나가를 패퇴시킨 사이가중, 단가가와 전투



 덴쇼 5년(1577년) 오다 노부나가가 사이가 공격을 개시하자, 스즈키 마고이치(鈴木孫一)가 그에 맞서 싸웠습니다.


스즈키 마고이치



 10년 이상이나 오다 노부나가와 항전을 계속한 제11대 법주 켄뇨를 중심으로 하는 이시야마혼간지의 근본에는 '싸워 서 죽으면 극락 왕생할 수 있다' 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 열광적인 신도에 의한, 죽음도 불사하는 병사들과 거기에 협력한 무장 집단의 존재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모리의 무라카미 수군이 제1차 키즈가와구 해전에서 노부나가를 격퇴하지요. 한편, 그런 수군과 함께 혼간지를 지지한 것이, 사이가중이 대량의 총과 사격 기술이었습니다. 사이가중은 기노카와 하류 지역에 사는 토착의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당시의 기슈(紀州)에는 하타케야마라는 훌륭한 수호가 있었지만, 이러한 토착의 세력이 몹시 강해져, 기슈의 수호도 이름뿐이었습니다. 코노야마(高野山)나 네고로지(根来寺)라고 하는 종교 세력이나, 사이가중 같은 세력이 각각 자치를 하는 무정부상태였습니다.



이세국의 위치입니다



 하지만 사이가중도 확고 부동한 집단이 아니라, 몇개의 집단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이가에도 농업에 적절한 토지가 따로 있어, 그 생산력에 의해 경제 기반이 확립되어 있던 장소와 그렇지 않은 장소가 있었기 때문에 균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농업에 적합하지 않는 지역의 사람들은 그 수입원을 교역으로 삼아, 멀리 중국에도 진출했습니다. 그 덕분에 조선기술은 매우 발달했으며, 총에도 먼저 주목하여, 자력으로 총의 생산을 하고 어릴 적부터 총술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여기에 집중한 것이 혼간지 켄뇨입니다. 사이가중은 토바시 쯔네하시(土橋平次)를 위시로하는 토바시가가 유명했지만, 이 이시야마 전투에서 일약 이름을 날린 것이 바로 스즈키 마고이치입니다. 


 화목이 찢어진 덴쇼 4년(1576년) 그 텐노지 전투에 등장한 사이가군은 혼간지의 패색이 짙어졌을 때 수천정의 일제 사격을 실시해, 전황을 역전시켰다고 합니다. 사실 이 전투는 양측이 서로 승리를 주장하기 대문에 승패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이 때 사이가를 이끈 것이 스즈키 마고이치여서 이 때 부터 사이가중의 대표는 마고이치라는 인식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하는 노부나가측은 마고이치의 모츠마 라이렌(下間頼廉)의 목을 교토에 효수 했다고 하지만, 사실 이 목들은 가짜였습니다.


 사이가에 얼마나 총과 총을 다루는 사람이 존재했는지는 잘 모릅니다만, 그 후도, 혼간지 켄뇨는  500, 1000등의 사이가의 총병을 원군으로 요청했기 때문에, 상당한 수의 전문적 총병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그들에 대해서, 노부나가가 위험을 느낀 것은 지당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덴쇼 5년(1577년) 먼저 움직여, 마고이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이가중의 대부분을 아군에게 붙인 후, 원래 노부나가와 사이가 좋았던 네고로지의 협력도 얻어 낸 노부나가는 10만 대군을 인솔하고(물론 과장된 듯 합니다) 기슈에 쳐들어 갔습니다. 한편 마고이치는 수천의 군사를 지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비책이 있었습니다. 


전국 굴지의 용병, 사이가중



 기슈의 혼간지가 있던 와카노우라(和歌浦) 근처의 미로쿠지산(弥勒寺山)의 정상에 성이나 성채를 쌓아 올린 마고이치는 산아래를 흐르는 단가가와(和歌川)에 대책을 강구합니다. 이 단가가와는 비교적 바닥이 얕은 강입니다. '아마, 노부나가군의 선봉은 단번에 말로 강을 건너 쳐들어가려고 할 것이다'라고 생각한 마고이치는 그 강바닥에 무수한 통을 묻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단번에 돌격하려고 한 노부나가군은 얕은 강을 건너려고 하지만, 중간 정도까지 오자, 왠지 말들이 나아가지 못하지요. 여기에, 부채를 펴고 마고이치는 공격을 명령합니다. 사카이중의 정예 총병의 조준사격된 기마대는 차례차례 쓰러지고 맙니다. 「신초코기」에 의하면, 이 이 밖에도 마고이치는 말방책(馬防柵)도 구축하고 있었다고 하고, 「음덕 태평기」에서는 3단 격발도 했다고 합니다.


 분명히 우세한 전투를 했지만, 수의 차이는 심각해 마고이치 측에도 상당한 희생자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대에, '모리군이 구원에 달려와 후방에서 노부나가군을 치려는 기색이 있다'는 소문이 흐릅니다. 아무리 노부나가라도, 그렇게 되면 패배는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마고이치와 화해합니다.이 전투는 무승부지만, 그날 밤에는 각자 승리를 자축하며 술을 마셨습니다. 전투에서 부상당한 마고이치는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매우 기뻐하며 춤추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현재, 기슈 토쇼궁의 단가제에 계승되고 있는 사이가 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루이스 프로이스의 「예수회 일본 연보」에서는 '노부나가는 2회 사이가를 공격해 2회 모두 실패했다.'라고 된 부분도 있어 후에도 전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마고이치는 앞으로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했겟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