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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다의 수군, 모리 수군에 참패하다 키즈가와구 해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다의 수군, 모리 수군에 참패하다 키즈가와구 해전


 덴쇼 4년(1576년)11, 10년에 걸친 오다 노부나가와 이시야마 혼간지의 전투 중 '제1차 키즈가와구 해전(第一次木津川口海戦)'이 전개되었습니다.


 천하 통일을 목표로 하는 오다 노부나가와 종교에 의한 단결로 권력에 지배되지 않는 자유 도시를 운영하는 혼간지의 대립은 마침내, 겐키 원년(1570년) 오사카 이시야마혼간지의 법주 캔뇨가 전국의 혼간지 문도에게 한 요청에 의해서 이시야마 전투로 격화됩니다. 이 도중 노부나가에 의해 쇼군의 권력을 잃은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요청에 응해 이시야마 혼간지에 다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겐신, 아사쿠라 요시카게, 아자이 나가마사등에 의한 노부나가 포위망이 깔리게 됩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하나 하나 정리하고, 이시야마 혼간지와도 강화를 맺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강화는 깨지고 텐노지 전투가 일어납니다.(텐노지 전투)


 텐노지 전투의 뒤, 노부나가는 성채의 수를 늘려 혼간지를 포위합니다. 한편, 포위된 혼간지는 농성전을 펼치려 하는데,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자금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 관서의 무장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숙부 깃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와 함께, 혼간지를 지원하려 나섭니다. 모리의 정예 수군을 활용해 혼간지에 해로로 자금의 운반을 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혼간지로의 자금을 가득히 실은 수백척의 선단이 그 호위를 하는 무라카미 수군 약 300척과 함께 오사카 만에 나타나 이즈미의 카이즈카(貝塚)에 도착햇습니다.



당시의 진형도



 여기서, 기슈의 사이가(雑賀) 수군과 합류한 선단은 사카이에서 키즈가와구로 향합니다. 이에 노부나가는 큰 망루가 설치된 안택선(安宅船 약 10척을 중심으로 무사선(武者船) 300척을 좌우에 넓게 배치해 대응합니다. 이렇게 해서, 덴쇼 4년, 제1차 키즈가와구 전투의 막이 열립니다. 가로로 일렬로 늘어선 오다 수군에, 세로의 편제로 대응하는 모리 의 무라카미수군은 신호가 울리자, 미리 결정된 역할 분담에 따라 훌륭하게 제휴해 공격을 개시합니다. 


 무라카미수군의 지휘를 하는 것은, 아버지 무라카미 타케요시(村上武吉)의 명령으로 참전한 24세의 젊은 사령관 무라카미 모토요시(村上元吉)였습니다. 널판지로 높은 벽을 만들어, 그 뒤로 사수를 숨긴 노쿠라부네(盲船)가 오다측으로 일제히 화살을 발사합니다. 또한 뒤이어, 호로쿠(焙烙)를 던집니다.



호로쿠는 일종의 수류탄입니다



 당연히 오다군의 배에는 불길이 올라, 혼란에 빠지지요. 호로쿠는 초벌구이한 자기에 화약을 채우고 줄을 매달아 적선에 던지는 수류탄과 같은 물건입니다. 갑작스런 화재에 당황한 병사가 차례차례로 바다로 뛰어들기 시작하면, 세번째의 무사선 적선에 뱃머리를 부딪치면서 배를 연결해, 잇달아 칼을 가진 병사가 오다군의 배로 타, 선상의 적병을 무참이 벱니다. 이러한 공격을 피한 강한 배에는, 끌을 가진 병사가 물속에 들어가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는 사쿠이리(鑿入り)라고 하는 게릴라 공격도 감행했습니다.



안택선, 망루가 올려져 있습니다무사선, 나룻배 같은 겁니다


 이 환상적인 연계 공격에 의해「신초코기」에도 '명백히 수백이 죽어, 서국의 배가 승리했다.'라고 되어 있듯이, 노부나가군은 대혼란에 빠져 일방적인 전투가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자금은 이시야마혼간지에 반입되어 혼간지측의 사기도 고조되었습니다. 심한 패배를 입은 노부나가는 모리 수군에게 칼을 갈며, 다음 해전을 준비하니, 이것이 바로 제 2차 키즈가와구 해전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