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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9) 쿄고쿠 가문의 세키가하라 오츠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세키가하라 전투(9) 쿄고쿠 가문의 세키가하라 오츠성 공방전 게이쵸5년(1600년) 9월 7일, 쿄고쿠 다카쓰구(京極高次)가 농성하는 오츠성(大津城)을 둘러싼 서군의 여러 무장이 오츠성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7월에 들어가 본격적인 세키가하라가 시작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중진인 마에다 토시이에도 죽어 도요토미 가문 내의 균열(히데요시 유언)이 점차 심해집니다. 그런 가운데, 거두의 죽음으로 따라 오대로중에서도 필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종종의 상경 요청에 응하지 않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에 모반의 혐의를 덮어 씌워 아이즈 정벌을 결행하게 됩니다.(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이렇게 되어 부재중이 된 후시미성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공격을 시작합니다.(후시미성 공방전) 이에 ..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쇼군 취임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쇼군 취임 겐큐 3년(1192년) 7월 12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정이 대장군(쇼군)에 임명되었습니다. 일본 무가를 통솔하는 것은 '쇼군'입니다. 이 쇼군은 '정이대장군'이라는 뜻으로, '정이'란 홋카이도를 정벌한다 라는 뜻입니다. 즉, 정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상시에 새로 생기는 직책이었습니다. 이 쇼군이 거주하는 곳이 '막부(幕府)'였습니다. 이 말은 중국 고전에서 '장군의 막영을 막부라고 한다'는 기술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갠큐 3년(1192년) 7월 12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쇼군에 취임한 것으로 이 날을 보통 '가마쿠라 막부'가 생겨난 날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막부가 생긴 날을 이(1) 이(1) 쿠(9) 니(2)라고 ..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8) 후지가와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8) 후지가와 전투 지쇼4년(1180년) 10월 20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인솔하는 미나모토 군과 타이라노 코레모리(平維盛)가 인솔하는 타이라 군의 맞붙은 후지가와 전투(富士川合戦)가 있었습니다.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를 중심으로, 전성기를 자랑하는 타이라 가문 아래에서 불우한 날들을 보내고 있던 모치히토왕(以仁王)이, 지쇼4년(1180년) 4월에 발한 타이라 토벌의 영지(타이라 토벌의 영지)를 내립니다. 덴노도 아닌 일개 황태자가 낸 영지는 원래대로라면 별 효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쇼 삼년의 변으로 기능이 마비된데다 타이라 가문이 옹립한 덴노는 허수아비에 불과했습니다.(지쇼 삼년의 변) 즉, 반 타이라 세력에게 모치히토왕의 영지는 좋은 명분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오미의 패자, 롯카쿠 가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오미의 패자, 롯카쿠 가문 일본 전국시대에는 훌륭한 가문들, 새로 일어난 가문이 난립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다, 우에스기, 다케다 등의 가문들은 매우 유명하지만, 이번에 다룰 롯카쿠 가문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롯카쿠 가문의 성립 롯카쿠 가문은 사사키(佐々木) 가문의 적류로, 덴노의 핏줄이 이어지는 가문이기도 합니다만, 여러 이설이 있어 확실한 출자인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사사키 가문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와 함께 타이라 가문을 평정하여,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그로 인해 각지의 수호직을 받아 명문 가문의 반열에 올라서게 됩니다. 사사키 가문이 롯카쿠 가문으로 자칭하게 된 것은 교토에 있는 저택의 이름이 롯카쿠 히가시노토인(六角東洞院)였기 때문에, 롯카쿠를 자칭하게 된 것입니..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에치젠의 패자, 아사쿠라 가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에치젠의 패자, 아사쿠라 가문 아사쿠라 가문의 성립 아사쿠라 가문은 카이카, 코토쿠덴노의 핏줄을 지니고 있습니다. 헤이안 말기에 아사쿠라 마을로 이주해, 스스로를 '아사쿠라'라 칭하게 된 것입니다. 아사쿠라 가문은 에치젠에 기반을 쌓아 세력을 서서히 확대해 나갑니다. 남북조의 동란에서는 아사쿠라 가문은 둘로 나뉘어져 싸우게 됩니다. 이 사이에 급격히 힘을 기른 아사쿠라 가문은 쇼군의 집사 가문을 역임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전공을 쌓아 에츠젠 7개 지역의 지도우(地頭)로 제수받게 됩니다. 얼마 뒤 에치젠 수호인 시바 가문의 권위가 약화되게 됩니다. 이에 아사쿠라 가문은 수호대 가문인 가이 가문과 힘을 합쳐 에치젠에서 실권을 잡으려 합니다. 막부의 개입에도 하루 하루 변화..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츄고쿠의 패자, 모리 가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츄고쿠의 패자, 모리 가문 일본 전국시대 최고의 다이묘를 손꼽자면 절대 빠질 수 없는 것이 모리 모토나리입니다. 지략과 모략으로 일개 토호에서 시작해 츄고쿠를 재패하는 대 다이묘가 된 모리 가문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모리 가문의 성립 모리 가문은 계도에 따르면 아메노호히노미코토(天穂日命)를 선조로 삼고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냥 다이묘들이 자신의 가계를 신성화 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것으로, 실제로는 오오에(大江)가문이 선조인듯 합니다. 그 자손들 중 사가미의 모리장(毛利庄)을 영유하며, 토지의 이름을 따서 '모리' 를 자칭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가문들에게 밀려 츄고쿠 아키국의 요시다장의 지도우(地頭)가 되어, 여기서 츄고쿠에서의 모리 가문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모리 가문의 중..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에치고의 패자, 나가오(우에스기) 가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에치고의 패자, 나가오(우에스기) 가문 전국시대 최고의 영웅 중 하나인 우에스기 겐신, 그의 가문은 사실 '우에스기'가 아닌 '나가오'가문입니다. 그는 후에 노리마사에게서 우에스기 가문을 이은 것이지요. 오늘은 그의 출자인 나가오 가문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나가오 가문의 성립 나가오 가문은 칸무헤이시 카마쿠라 당(桓武平氏鎌倉党)의 일족인 유서 깊은 가문입니다. 원래는 강성했던 가문이지만 모종의 실수로 예전보다 몰락해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우에스기 가문의 집사(執事)를 맡았습니다. 우에스기 가문이 에치고의 수호가 되자 나가오 가문은 수호대에 취임하게 됩니다. 이 이후로 나가오 가문은 대대로 우에스기의 집사 가문으로, 수호대를 맡았습니다. 나가오 가문의 발전 나가오 가문은 그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붉은 기마군단, 다케다 가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붉은 기마군단, 다케다 가문 일본 전국시대에서 최고의 라이벌 중 하나는 아마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 아닐까요? 오늘은 다케다 신겐의 다케다 가문에 대해 다뤄보려고 합니다. 다케다 가문의 발상 다케다 가문은 가이겐지(甲斐源)의 일족으로, 매우 유서깊은 집안 입니다. 그 선조는 하치만타로 요시이에(八幡太郎義家)의 동생인 시라기 사부로 요시미츠(新羅三郎義光)입니다. 그는 난을 평정해 형의 목숨을 구해준 다음 가이노카미(甲斐守),히타치노스케(常陸介)를 역임한 뒤 교부쇼유(刑部少輔)를 맡았습니다. 그는 아들들을 사타케, 다케다 마을에 배치해 힘을 기르려 했습니다. 하지만 두 아들들은 각각 지방의 반발과 문란한 생활로 가이국으로 유배당합니다. 이때부터 '다케다 마을'에서 영유한 일로 '다..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시고쿠의 패자, 쵸쇼카베 가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시고쿠의 패자, 쵸쇼카베 가문 전국시대의 초첨은 언제까지나 교토를 비롯한 기나이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큐슈나 시고쿠의 전국시대는 주목을 덜 받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국시대 시고쿠에서도 큰 혼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고쿠의 패자가 되었던 것이 다름아닌 쵸쇼카베 가문입니다. 쵸쇼카베 가문의 성립 쵸소카베 가문은 하타(泰) 가문의 후예를 자칭하고 있었습니다. 하타 가문은 고대의 유력 가문으로, 진시황제의 자손인 유즈키노키미(弓月君)가 일본에 도착해 세운 가문입니다. 하타 가문은 야마시로 국의 카도노군 일대를 영유했고, 우즈마사(太秦)를 본거지로 세력을 쌓아 나갔습니다. 후에 쇼토쿠 태자를 모시며, 세력을 한 층 더 강하게 만들어 나갑니다. 가마쿠라 시대 초기..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관동의 패자, 후 호조 가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관동의 패자, 후 호조 가문 전국시대의 가장 큰 특징인 '갑작스런 출세'를 온 몸으로 체현한 가문이 둘 있으니, 바로 사이토 가문(사이토 가문)과 후 호조 가문입니다. 호조 가문의 성립, 호조 소운의 활약 사실 일본사에서 호조 가문은 그 전에도 있었습니다. 전기의 호조 가문은 덴노와 권력투쟁을 했을 정도로 강성한 힘을 가진 가문이었습니다. 이와 구별하기 위해 전국시대의 호조가문은 전기의 호조가문과 비교하기 위해 '후호조 가문' 이라고 부릅니다. 호조 가문을 일으킨 것은 이세 신쿠로 나가우지(伊勢新九郎長氏)로, 후에 '호조 소운'이라고 불리는 인물입니다. 그는 생전에는 스스로를 '호조 소운'이라고 자칭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혼란을 막기 위해 호조 소운으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소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