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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가문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츄고쿠의 패자, 모리 가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츄고쿠의 패자, 모리 가문



 일본 전국시대 최고의 다이묘를  손꼽자면 절대 빠질 수 없는 것이 모리 모토나리입니다. 지략과 모략으로 일개 토호에서 시작해 츄고쿠를 재패하는 대 다이묘가 된 모리 가문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이치몬지미츠보시一文字三つ星

모리 가문의 성립


 모리 가문은 계도에 따르면 아메노호히노미코토(天穂日命)[각주:1]를 선조로 삼고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냥 다이묘들이 자신의 가계를 신성화 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것으로, 실제로는 오오에(大江)가문이 선조인듯 합니다. 그 자손들 중 사가미의 모리장(毛利庄)을 영유하며, 토지의 이름을 따서 '모리' 를 자칭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가문들에게 밀려 츄고쿠 아키국의 요시다장의 지도우(地頭)가 되어, 여기서 츄고쿠에서의 모리 가문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모리 가문의 중흥을 이끈 모리 모토나리



모리 모토나리 초상화



 모리 가문을 센고쿠 다이묘로 이끈 것은 다름아닌 모리 모토나리입니다. 아리타성 공방전(아리타성 공방전)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모토나리에게는 많은 형제가 있었는데, 그들은 여기저기에 뿌리박아 모리의 가신단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모토나리의 후계 승계를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아마고가 뒤에 서 있는 동생 모토츠나(元綱)를 옹립하려는 파와 싸운 모토나리는 가독을 승계하는 데 성공합니다.(모리와 아마고) 이에 아마고 하루히사가 병사를 일으켜 모토나리를 공격하자, 이를 코오리야마성에서 훌륭히 격퇴하며 이름을 알립니다.(코오리야마성 공방전) 그 뒤에 삼만 다카카게를 코바야카와 가문을 잇게 하고, 차남 모토하루를 킷카와 가문을 잇케 하여 그 두 가문을 손에 넣은 모리는 승승장구 해 갑니다.(킷카와, 코바야카와 탈취


 모리가 의탁하던 오오우치 가문 내부에서 란이 일어나 스에 하루카타가 실권을 잡자, 모리 모토나리는 반기를 듭니다. 그로 인해 일어난 이쓰쿠시마 전투(이쓰쿠시마 전투)에서 훨씬 많은 적의 군세를 완전히 격파해 버린 모리 모토나리는 아마고 가문을 정벌해 세력을 기르고, 이어 아키와 히고의 쿠니진을 포섭한 모리 모토나리는 츄고쿠 11국을 영유하는 센고쿠 다이묘로 일약 성장하게 됩니다. 큐슈에서 세력을 길러 츄고쿠로 오려는 오오토모의 군세를 모지성에서 격파한 모토나리는(모지성 공방전) 당당히 츄고쿠에 군림합니다. 얼마 뒤, 노부나가와 갈등이 생긴 쇼군 요시아키가 만든 노부나가 포위망의 일익으로 참여한 모리 가문은 포위당한 이시야마혼간지에 무라카미 수군을 파견해 키즈가와구 해전에서(키즈가와구 해전) 오다의 수군을 쳐 부수어 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차 키즈가와구 해전에서 등장한 철갑선에 패배한 모리 수군은 이어 하시바 히데요시가 이끄는 츄고쿠 정벌군에 돗토리성(돗토리성 공방전), 타카마츠 공방전(타카마츠성 공방전)에서 패배하나, 얼마 뒤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모리 모토나리는 향년 73세로 자식들에게 모리 영지의 보전을 맡기고 죽음을 맞이 합니다.



모리 데루모토와 모리 가문의 몰락



모리 데루모토 초상화



 모리 모토나리의 적남인 다카모토는 급사했었습니다. 그의 아들인 데루모토가 모리 가문을 잇게 됩니다. 데루모토는 히로시마성을 축성 시작하게 됩니다.(히로시마 축성 시작) 그리고 이윽고 찾아온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모리 데루모토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청을 받고 출진해(모리 데루모토 출진) 서군의 총대장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합니다. 그러나 스스로는 오사카성에 머물고 양자인 히데아키를 전투에 참가시키나, 그 역시 적극적으로 전투하지는 않았습니다. 전투 이후 최소 영지를 보전한 모리 가문은 이후 오사카의 진에도 참가하는 등 가문의 보전에 힘을 썼습니다.

  1. 일본의 신의 이름으로, 백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