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츄코쿠의 분수령 모리와 아마고의 혼담
전국시대 츄고쿠 하면 모리 모토나리지만, 이때는 모리가의 상속자를 잇고나서 아직 2년째, 게다가 약관 27세의 어린나이였기 때문에 강성하다고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스오우를 본거지로 한 오오우치 요시오키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이어지는 수호이며, 이즈모를 본거지로 하는 아마코 쓰네히사는, 수호의 쿄고쿠와, 수호대의 가계인 아마고 쯔네히사를 스스로 넘어뜨려 1대로 츄코쿠 11개성을 지배하는 다이묘에 오른 걸물이었습니다. 서로의 영지 확대를 노리고 항상 싸우는 이 두 대영주아래에서, 모토나리의 모리가와 킷카와 요시쯔네의 킷카가는 그때그때의 형세에 의해서 아마고가에 협력하거나 오오우치에 협력하고 있었습니다.
에이쇼 3년(1506년)에 모토나리의 아버지가 병사했을 때 후계자가 어렸던 모리가는 명문 오오우치가에 복종을 표명해 요시오키의 신하가 됩니다. 그 다음 해에 성인식을 하고 모리를 이은 것이 모리 오기모토(毛利興元), 모토나리의 형입니다. 그러나 그는 불과 5년 후, 24세의 젊음으로 죽어 버려 그 후를 이은 것은 불과 2세의 오가모토의 장남 고우마츠마루(幸松丸)였습니다.
당시 상황입니다
킷카와 쯔네모토가 사위인 아마고 쓰네히사에게 딸을 모리와 결혼시켜보자는 제의에, 자신의 딸인 쓰네히사의 아내가 거절해도 계속 권해 왔습니다. 그러자 쓰네히사는 직접 거절의 편지를 씁니다. 이 킷카와 쯔네모토의 킷카와가는 후에 모토나리의 차남이 쯔네히사의 양자로 들어가 깃카와 모토하루와 자칭하게됩니다. 결과적으로 모리와 한 가족이 되 버리지요. 이 시점에서 쯔네모토의 손자 모토쯔네(元経)의 여동생이 아마고가로 시집갔고, 모토나리의 여동생이 모토쯔네에 시집을 간 밀접한 관계였습니다. 상승세의 아마고가가 예전부터 종종 아키나 빗츄를공격했었기 때문에 아키 일대의 고쿠진들은 오오우치의 산하로 기울고 있던 때에 아들의 신부의 친가이며, 사위이기도한 모리를 아마고가와 묶기 위한 혼담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혼담이 성립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7년 후 모토나리가 모리를 잇는 무렵에 모리는 아마고가에 들어가나 아마고가가 모토나리를 적대했던 남동생을 지지했다는 사실을 알게된 모토나리는 다시 오오우치 산하로 돌아가 버려, 아마고 쓰네히사가 이에 출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이윽고 코오리야마성 공방전으로 이어집니다. 만약 모토나리가 아마고와 결연을 맺었다면 츄코쿠지역의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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