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관서의 오케하자마, 모리 모토나리 등장
아리타성 공방전
에이쇼 14년(1517년) 10월 22일, 다케다 모도시게(武田元繁)에 공격받은 아리타성을 구원할 수 있도록 출진한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모도시게를 토벌해 그의 첫 출진을 장식했습니다.
츄코쿠지역
이때, 츄고쿠 지방에서는 스오우의 오오우치씨와 이즈모의 아마고씨가 격전을 벌이고 있었고 주변 지방의 소호족들은 그 두세력의 중간에서 딱히 행동을 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어느 세력에 들어갈 것인가에 대해 소호족들 간 분쟁의 불꽃이 피어나기 시작되었습니다. 오오우치가의 당주 오오우치 요시오키가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옹립하고 상경해, 에이쇼8년(1511년) 후나오카산 전투에 승리하고 중앙에서의 실권을 잡는데에 반비례 하는 듯이, 부재중이 된 서쪽 지방에서는, 그 분쟁이 서서히 격화해 가고 있었습니다.
원래 아키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다케다가가 수호를 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국시대가 열려 소호족들이 각자 영지화해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케다가의 옛 영토는 조금 밖에 남지 않았지요. 다케다 모도시게는 이 상황에 불만을 가져 어떻게든 이전의 영지를 회복할 기회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아키 내부에서 소호족들 간의 전투를 멈추도록, 요시오키가 막부의 명령으로 모도시게에게 아키 내부를 진정 시키도록 명했습니다. 이것을 기회로 분쟁을 중재할 수 있도록 행동을 개시했지만, 진정은 커녕 오히려 분쟁을 크게 하는 결과가 될 것은 눈에 보이고 있습니다.
당시 츄고쿠 상황
에이쇼 13년(1516년) 모리가의 당주가 젊은 나이에 죽고, 그 아들이 아직 2세였기 때문에, 이 때를 대찬스라고 본 모도시게는, 아리타성(有田城)을 공격합니다. 이 아리타성은 2년전에 모리가가 다케다가에게서 빼앗아 킷카와 모토쯔네(吉川元経)에게 지키게 한 성입니다. 이 성을 빼앗기면 다음은 모리가의 영지에 다케카가가 난입해 오는 것은 명백합니다. 이렇게 해서 에이쇼 14년(1517년) 그 아리타성을 구원하기 위해, 모리 모토나리가 출진합니다. 그의 나이 21세로 늦은 첫 출진이었습니다. 사실, 다케다가의 대군을 보고 아직 조금밖에 군세가 모이지 않는 상황에 모리가의 측근들에게서는 출진이 반대되었지만, 다케다가에 의한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모토나리는 전장으로 달려 듭니다.
우선, 모토나리가 목표로 한 것은 시로야마의 기슭에서 목책과 망루를 쌓아 올려 방어전을 치고 다케다 부하 쿠마가이 모토나오(熊谷元直)의 진과 대치합니다. 21세의 젊음을 가진 모토나리는 이 전투에서 선두에 서 많은 적을베고 그 와중에 요시카와의 원군 200이 더해져, 마침내 쿠마가이의 진을 점령해 모도시게의 본영에 가까이 진군합니다. 방위선이 찢어진 일을 안 모도시게는 계속 아리타성을 공격하는 것과 동시에 군세의 반을 주변에 배치해 모토나리의 진격에 대비합니다. 반이라 해도 총원 4,000명. 공격하는 모리가의 군세는 원군을 합쳐도 1,000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쿠마이 모토나오와의 일전을 벌써 해내고 있기 때문에 군세역시 지친 상태였지요.
그렇지만 모토나리는 엄청난 통솔력을 발휘해 약 2시간 동안몇번이나 돌입을 반복했습니다. 하지만 수의 열세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여서 결국 모리가의 군세는 서서히, 후방으로 후퇴해다, 강을 건너 패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한 화살이 최전선에서 지휘하던 모도시게에 적중해, 모도시게는 그대로 물 속에 빠져 버립니다. 그때 재빠르게 모토나리의 부하 이노우에 미츠히사(井上光久)가 목을 잘라 칼의 끝에 끼어서 높게 내걸며 외칩니다. "대장 모도시게 죽었다!" 당연, 한순간에 전세는 바뀌어, 패주중이었던 모리가의 군세는 역습하고 주인을 잃은 다케다가의 군세는 완패하여 패주하게 됩니다.
당시 상황도
전투 종료 뒤에, 모리가의 피해는 약 300, 다케다가의 피해는780으로 결과적으로는, 훌륭한 첫 출진이 되었습니다. 모토나리도 아리타성을 지키는 것만을 목적으로 왔지, 설마 수호 본인마저 토벌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승리입니다. 이 아리타의 야전은 소수 인원으로 다수를 넘어뜨렸던 것 뿐만 아니라 모토나리를 알린 전투로, 서쪽 지방의 오케하자마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21세에 이 첫 출진을 장식한 모토나리가 이쓰쿠시마 전투로, 전국시대에 본격적으로 뛰어 드는 것은 59세입니다. 어떻게 보면 운이 따른 승리라 생각되는 이번 전투입니다만, '모리 모토나리경전' 이라는 문헌에 의하면 이 전투 전에, 모토나리의 중신의 여러명이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는 모도시게 부하의 에 대한 이야기도 있어 모토나리의 모략과 지략의 편린을 보여 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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