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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전국시대; 호조 소운의 사가미 재패의 시작, 오카자키성 전투

일본전국시대;

호조 소운의 사가미 재패의 시작, 오카자키성 전투




 에이쇼9년(1512년), 호조 소운에게 사가미 오카자키성을 공격받은 미우라 요시아쓰가 스미요시성에 패주 했습니다.


 소운은 바람처럼 등장해(이즈습격) 오다와라성도 손에 넣고(오다와라성 탈취호리코시쿠보도 멸하고, 이즈 일대의 지배를 강고한 것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편으로는 공사를 보좌하는 역할 관동 관령직의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양 우에스기가의 분쟁은 어느덧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의 구적의 코가쿠보와의 전투로 넘어가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는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나 그 부하인 소운을 의지하게 되어, 이윽고 에이쇼 원년(1504년) 쿠즈류가와 전투(쿠즈류가와 전투)가 있었지만, 승패는 불분명했지요.  하지만 확실해진 것이 하나 있었으니 '소운이 우에스기보다 강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상황도


 소운의 강성함을 깨달은 양우에스기가는 동맹 관계를 부활시켜 소운을 경계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에스기가 앞에 높인 것은, 관동의 소운만이 아니었습니다. 에이쇼4년(1507년), 에치고의 수호대 나가오 다메카케의쿠테타가 있었고 다메카케는 한층 더 에이쇼7년(1510년)에는, 다메카케에게 당한 후자요시의 형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 당주인 우에스기 아키사다를 습격해 살해했습니다. 게다가, 거기에 호응 하는 것 마냥 우에노에서는, 일찌기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와 대척하고 있었던 나가오 하루카게가 다시 반기를 들었으며, 무사시에서는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의 가신 우에다 마사모리(上田政盛)가 군사를 일으키는 등 관동 각지에서도 군사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부자가 망해도 삼년은 간다고 우에스기 양가가 손을 잡아 이 난관을 어떻게든 견딥니다. 이 때, 각지의 형세를 살피던 소운이었지만 혼란은 소운에게 미쳐 고쿠라이쟈마성(高麗寺山城)을 양우에스기의 연합군에 습격당해 약간의 철퇴를 하게 됩니다. 아직 양우에스기가를 상대로 하는 것은 시기 상조라고 본 소운은 일단 무사시에의 진출을 선행시키기 위해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 당주인 우에스기 도모요시(上杉朝良)와 화평을 맺고, 그 군세의 화살을 사가미로 돌려 사가미를 재패하러 향합니다. 이번 상대는 사가미의 수호 미우라 요시아쓰(三浦義同), 오우기가야쯔우에스기 가문을 나가, 미우라가의 양자로 들어가 있던 인물입니다. 


 신중한 소운은 빨리 움직이지 않고, 때를 기다립니다. 에이쇼9년(1512년) 양우에스기가가 사이에 다시금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지난번은, 아직도 시기 상조라 여겨 칼을 거둔 소운이지만 우에스기 양가가 분열하면 이야기는 달라지지요. 조속히, 도모요시와의 동맹 파기를 표명한 소운은 그해 요시아쓰가 성주를 맡는 사가미 오카자키성(相模岡崎城)을 공격했습니다.당연히 요시아쓰는 패배해, 미우라 반도의 밑에 있는 스미요시성(住吉城)으로 패주 합니다. 그 기세를 몰아 카마쿠라로 들어온 소운은 스미요시성의 앞에 타마나와성(玉縄城)을 축성 하기 시작합니다. 



타마나와성(玉縄城)



 물론, 이것은 전방에 있는 스미요시성을 공격하기 위한 임시방편의 성입니다만, 망루로 둘러쌓인 요새수준의 견고함을 가졌습니다. 후방에 있는 무사시를 어느정도 의식했기 때문이지요. 무사시를 머지않아 공격할 때에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기 위한 축성이었습니다. 에이쇼10년(1513년), 아침이 되고 나서 곧바로 행동을 개시한 쇼운의 군세는 한달이 채 가기도 전에 스미요시성도 함락 시켜 드디어 요시아쓰를, 반도의 끝에 있는 아라이성으로 추적합니다. 그러나 소운은 여기에서도 당황 하지 않고 소란피우지 않고 신중하고 확실하게 반도에 끝이라는 천연의 요충지인 성을 상대로 하는데 고생할 필요가 없다며 지구전으로 돌입합니다. 바다에서 물자를 보급하며 농성을 펼친 미우라 군세이지만, 소운은 아라이성의 원군으로서 달려 든 오오타 스케야스(太田資康)를 토벌해 서서히 형세를 유리하게 해서 결국 이 성마저 소운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