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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나가오 다메카케의 에치고 평정

일본 전국시대;

나가오 다메카케의 에치고 평정



 에이쇼4년(1507년) 8월 7일, 나가오 다메카케(長尾為景)에 에치고를 빼앗긴 우에스기 후사요시(上杉房能)가, 마츠노야마고우(松之山郷) 아마미즈코시(天水越)에서 할복 했습니다.


 나가오가는 대대로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를 시중드는 수호대 집안입니다. 관동 관령직을 독점하고 있던 같은 우에스기가 내에서,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가 관동의 패권을 두고 싸운 에이쇼 원년(1504년)의 쿠즈류가와 전투(쿠즈류가와 전투)에서는 다메카케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를 도와 참전했었습니다. 이런 그가 어째서 우에스기가에 반기를 들게 되었을까요?


  가마쿠라쿠보가 기억나시나요? 그런데, 에치고에는 원래 그 토지를 지배하는 강력한 호족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우에스기가는 관동으로부터 온 타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에스기가는 현지를 무난히 다스리기 위해, 토지의 권리에 관해서는 수호가 개입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해, 그들의 토지의 대부분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 수호 우에스기 후사요시는 부임하면서 이에 불만을 가지고 새로운 측량을 실시합니다. 측량을 다시 하고 나서, 납입하는 세금은 증가하고 지금까지는 고향에서 암묵적으로 소유하던 미등록의 전답에의 묵인도 없어져 무사들 뿐만이 아니라, 농민의 반발도 사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수호 불개입의 토지를 제일 많이 소유하고 있던 것은 다름아닌 수호대의 나가오가였습니다. 



에치고의 위치



 나가오가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지만, 그런데도 다메카케의 아버지 요시카케는, 온순히 불개입의 토지를 우에스기에 양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온화한 아버지와 달리, 격렬한 성격을 지닌 다메카케의 불만은 수면 아래에서 점점 커져 갔습니다. 앞의 쿠즈류 강변 싸움에서 병역에의 지출에 대한 것으로 이 불만은 한층 더 심해졌는데요. 결국 후사요시가 다메카케에게 연회의 자리에서 손아랫사람의 입장에서 잔을 받도록 강요해, 이에 분노한 다메카케가 잔을 부수어 반발한 일로, 한층 더 험악한 기운이 감돕니다. 


 이윽고, 에이쇼 3년(1506년), 온순했던 아버지 요시카케가 코시나카에서 분전중에 전사해 버렸는데요, 이 때 후사요시는 구원요청을 받았는데도 묵살했기 때문에 다메카케의 마음속 결의는 굳어집니다. 다메카케는 그 유명한 신겐의 아버지 답게 냉정하고 주도면밀하게 준비를 거듭합니다. 이대로 후사요시를 토벌할 뿐이라면 단순한 모반이 됩니다. 아무리 힘이 쇠약해졌다고는 하더라도 수호나 막부 자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지요. 그는 우선, 막부에 사전 교섭을 하기 위해 막부의 유력자인 하타케야마가에 사전 연락을 해 후사요시의 양자인 사다자네(定実)를 수중에 확보합니다. 



후사요시가 할복한 아마미즈코시(天水越)



 그리고 사다자네를 차기 수호로 한다고 하는 대의명분을 내걸어 후사요시가 사는 후츄의 곡신 신관의 바로 옆에 있는 이나리에서 군사를 일으킵니다. 물론, 이 소식을 들은 후사요시는 곧바로 부하들을 소집하지만 측량의 건으로, 부하들의 마음은 후사요시로부터 멀어지고 있어 적극적으로 소집에 응하는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얼마안되는 측근과 후츄에서 후사요시는 관동에 있는 형 아기사다에게로 도망칩니다. 야스즈카가도를 따라 도주하던 후사요시는 결국 아마미즈코시에서, 다메카게에 따라 잡혀 에이쇼4년(1507년), 할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앞의 사전 교섭의 덕에 막부가 사다자네를 차기 수호로 인정했기 때문에 다메카케의 모반의 죄 등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결국, 국민을 통합해 괴뢰인 신수호 아래서 사실상 실권을 잡은 다메카케는 자신의 아들, 우에스기 겐신(성이 다른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이 전국의 패자가 되기 위한 제일보를 내딛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