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관동의 정세가 움직이다, 타치강변 전투
에이쇼 원년(1504년),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와 호조 소운이 동맹해, 대립하고 있던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와 타치강변(立河原)에서 만나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는 관동을 기반으로 하는 무가 정권이면서, 교토에 정무의 중심을 두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관동 지배를 위한 특별한 직무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가마쿠라쿠보와 관동 관령입니다만, 그들은 차츰 교토에 필적하는 힘을 가지게 되어 서서히 쇼군과 대립하게 됩니다. 쿠보의 보좌인 관동 관령은 우에스기가가 독점하고 있고, 관동의 힘이 커져감에 따라 그 세력도 커져갔습니다.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가 교대로 관동 관령을 맡게 됩니다만 권력은 독점하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지요. 결국 양가는 차츰 대립하게 됩니다.
호각의 세력을 가지고 있던 양가였지만, 오기야 우에스기가의 집사인 오오타 도칸을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의 우에스기 사다마사가 욕실에서 암살한 뒤 사다마사도 낙마해 죽어, 우에스기 도모요시(上杉朝良)가 뒤를 이었습니다. 도모요시를 도운 것은, 전국 다이묘의 이마가와 우지치카와 그의 숙부인 호조 소운입니다. 이 기세를 타고, 토모요시의 거점인 무사시 카와고에성(武蔵河越城)을 포위하고 있던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의 우에스기 아키사다를 견제 하기 위해, 우지치카와 소운은 카와코에성의 근교에까지 진출합니다.
관동 지도
그들의 참전을 안 아키사다는, 에이쇼 원년(1504년)에 작전을 변경해 카와고에성의 포위를 풀어 전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타치강변에서, 양군이 만나, 전투에 돌입했습니다. 쌍방의 전사자가 합해 2천명 남짓에 달했다고 하기 때문에, 관동의 전투 중, 굴지의 대규모의 싸움이었습니다. 양군이 끝까지 분전을 계속했기 때문에 결국은 결착이 붙지 않았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에서는 겐신의 아버지인 에치고의 나가오 타메카케(長尾為景)가 참전해 분전 했기 때문에,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의 대승에 끝났다고 하는 기록도 있습니다.
또, 이 타치강변의 싸움은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가 이겼지만, 야마노우치와의 일련의 대립에 관해서는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의 승리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립 타치강변 일대는 후에 소운의 지배가 되어 우에스기 겐신이 야마오우치 우에스기가의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에게서 관동 관령직을 양보해지는 무렵에는, 관동 관령과는 이름뿐으로, 관동에는 후호조가의 영향력이 훨씬 커져 있었기 때문에 실리는 호조 소운이 챙긴 것이 아닐까 합니다. 소운은 젊은 무렵, '쥐가 2개의 삼나무를 갉아 먹는 꿈'을 보았다고 합니다. 소운이 쥐해에 태어나 2개의 삼의 나무는 두 우에스기가문(우에스기를 한자로 쓰면 上杉으로 '杉'이 삼이란 뜻입니다) 의 영향력을 뛰어넘은 영주가 될 것을 예지한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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