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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전국시대의 또다른 개막, 호조소운의 이즈습격

일본 전국시대;

전국시대의 또다른 개막, 호조소운의 이즈습격



 엔토쿠(延徳) 3년(1491년) 또는 묘오(明応)2년(1493년), 호조 소운(北条早雲)이 아시카가 막부의 분가, 호리코시 쿠보(堀越公方)를 공격해, 멸망 시킨 싸움인 '이즈 습격'이 있었습니다. 분가라고는 해도 막부가 지방의한 무장에 멸해졌다는 이 이즈 습격을 전국시대의 개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는 않습니다. 


 엔토쿠 원년, 초대의 호리코시 쿠보 아시카가 마사토모(足利政知)가 병사합니다. 그에게는, 적자 차차마루(茶々丸)와  측실 엔토쿠인(円徳院)이 낳은 쥰도우지(潤童子)라고 하는 두 명의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차차마루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양아치였습니다. 그는 너무나 흉포했기 때문에, 미치광이들을 가두어 두는 방과 같은 곳에 가두어 유폐 생활을 시켰지요. 당연, 마사모토는 내심 측실의 아들 쥰도우지에게 상속자를 잇게 하고 싶었겠지만, 그 표명하지 않은 채, 병사해 버렸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안 차차마루는 유폐 되고 있던 감옥을 탈출해, 엔토쿠인과 쥰도우지를 살해하고 자력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째 호리코시 쿠보를 칭하기 시작합니다. 부친이, 감옥에 가둘 정도인 그는 즉위하고 난 뒤 심각한 폭정을 하기 시작합니다. 대대로 이어온 중신의 충언을 듣고는 베어 죽이고, 백성들에게는 불합리한 세금을 무는 등 학정이 시작되지요.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가신이나 영주 지배하에 있는 백성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않게 되어 버립니다.



호조 소운



 그런 혼란을 타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스루가(駿河) 동부로 있던 호조 소운(北条早雲)입니다. 이때 소운은 이세 신쿠로 모리토키(伊勢新九郎盛時)라고 자칭하고 있었습니다만, 이에 대해 여러 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호조 소운으로 쓰겠습니다. 후에 센고쿠 3효융으로 불리는 소운은 엄청난 대기만성형 인물입니다. 50이후에서나 비로소 뜻을 세우고 세상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당시 소운의 누나(혹은 여동생)는 키타가와도노(北川殿)의 측실이었습니다. 소운은 누나의 힘으로 스루가의 이마가와 요시타다(今川義忠)의 객장으로 활약하다, 키타가와도노의 후계에 우지치카(氏親)를 앉혀 소우소쿠지성(興国寺城)의 성주가 된 무렵이었습니다.


 한 성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소운에게, 이웃나라의 혼란은 호기였습니다. 엔토쿠 원년(1491년) 혹은 묘오2년(1493년) 소운은 갑자기 호리코시쿠보를 습격합니다. '습격'이라고 하기에는 뭐한 것이 실은 소운 자신은 충분한 책을 가다듬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관동 관령의 권력 분쟁으로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와 야마우치 우에스기가 전투 상태에 있어, 야마우치 우에스기씨가 수호를 맡고 있던 이즈(伊豆)의 무사들은, 대부분이 그 전투에 빌려 나오고 있어 남아 있는 것은 백성뿐인 상태였습니다. 소운은 쳐들어가기 전의 정찰로서 상인으로 이즈에 잠입해서 그 땅을 조사하는 것과 동시에 백성들에게 여러가지 친절을 배풀며, '호리코시 쿠보가 넘어지면, 얼마나 생활이 좋아질까' 등의 이야기를 해서 영주 지배하에 있는 백성들을 동요시켰습니다.



이즈습격 상황도



 습격 당일은, 우지치카로부터 대량의 군사를 빌리는 것과 동시에  군선들을 써, 준비한 작전을 결행했습니다. 카라쿠리가 혈기왕성하고, 폭정을 일삼는 폭군이었지만 대기만성, 용의주도한 전국의 효웅 소운의 앞에서는 범 앞의 하룻강아지 였습니다. 싸움은 소운의 압승이 됩니다.  호리코시 쿠보는 멸망 했습니다. 이즈 일국을 손에 넣은 소운은, 객장으로부터 전국 다이묘에게 올랐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 60에 올라 70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난세라고 하는 큰 역사의 무대에서 경합에 나선 그는 이윽고 오다와라성을 탈취하러 향합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소운의 이 이즈습격을 전국시대의 개막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첫 번째 제대로 된 하극상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