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누가 관령의 후예가 될 것인가? 후나오카산 전투
에이쇼8년(1511년), 무로마치 막부의 관령 호소카와 마사모토 사후에 발발한, 일련의 후계자 분쟁인, '후나오카산 전투'가 있었습니다.
호소카와 마사모토 초상화
난세의 효웅으로 불린 관령 호소카와 마사모토 그는 '묘오의 정변'이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쇼군에 자신의 괴뢰를 앉히게 됩니다. 나중에 한번 묘오의 정변에 대해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극상으로, 전국의 막을 열며 권력을 쟁취한 이 남자는 결국, 가신에게 암살이라고 하는 하극상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마사모토는 생전 여성에겐 흥미가 없어 독신으로 평생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를 자처할 수 있는 양자만이 세 명 있었습니다. 관백 구조 마사모토(九条政基)의 아들 스미유키(澄之), 아와의 호소카와가에서 온 스미모토(澄元) 그리고 빗츄의 호소카와가의 타카쿠니(高国)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사실, 스미유키가 후계자로 지명되고 있었음에도 상관하지 않고, 나중에 양자가 된 스미모토를 새로운 후계자라고 지명했기 때문에 위기감을 안은 스미유키의 가신에 의해 마사모토가 암살되었다고 합니다. 에이쇼4년(1507년)에, 마사모토를 암살한 그들은 곧바로 당대의 무로마치 막부 쇼군 제11대 아시카가 요시즈미에게 스미모토를 호소카와 관령 계승자로 인정하게합니다. 이 사태에 위기감을 느껴 일단 오미에 피신하고 있던 스미모토는 현지의 고쿠민들을 아군으로 끌여들어, 아와때 부터의 중신 미요시 유키나가(三好之長)와 함께 군사를 일으킵니다. 세번째 양자인 타카쿠니는 양부의 뜻을 받들어 스미모토에 따라 ,함께 스미유키를 토벌합니다.
호소카와의 후계 분쟁
결국 그들은 스미모토를 죽입니다. 쇼군 요시즈미는 이번에는 스미모토가 호소카와 관령 계승자인 일을 인정하지요. 이미 빈껍데기 뿐인 쇼군에게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이 상속자 분쟁의 혼란을 호기라고 보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것이, 스오우의 전국 다이묘 오오우치 요시오키(大内義興)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에이쇼5년(1508년) 경부터, 스미모토와 타카쿠니가 대립하게 되지요. 타카쿠니는 요시오기와 손을 잡아 이번에는 스미모토를 공격합니다. 일련의 전투를 우세하게 이끈 타카쿠니의 세력은 마사모토에 추방되었던 전 (10대) 쇼군 요시타케(義稙)을 받들어 옹립했습니다. 게다가 타카쿠니는 스미모토의 본거지 아와의 세력을 축출하기 시작하지요.
에이쇼8년(1511년), 셋츠의 아시야 강변에, 스미모토의 세력인 호소카와 히사하루(細川尚春)를 공격하고 승리를 거둡니다(아시야 강변 전투). 그러나, 후나오카산 전투의 전초전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 전투의 직후, 호소카와 마사타카(細川政賢)과 하리마의 아카마쯔 요시무라(赤松義村)가 연달아 스미모토측에 가세합니다. 특히, 요시무라는 맹장으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는데요. 그의 참전의 영향은 지대해서, 형세는 단번에 스미모토측에게 유리하게 전개됩니다.
전황도
이 기세를 타 타카쿠니를 토벌하려, 교토로 침공한 마사타카, 요시무라와 이대로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고 생각한 타카쿠니의 세력은 일단, 탄바까지 물러나 거기서 군사를 모으고 태세를 고쳐 세우기로 했습니다. 단기간에 2만의 군세를 징집하는 일에 성공한 타카쿠니는 다시 교토로 진격해 타카오에 진을 칩니다. 스미모토는 후나오카산에 방어 시설을 구축해 적의 진입에 대비하게 되지요. 이렇게 해서 에이쇼8년(1511년), 양자는 후나오카산의 부근에서 격돌합니다.
이 때의 타카쿠니의 군세는 타카쿠니와 요시오키의 군사에, 탄바에서 모은 군사를 가세해 2만 5천이었다고 합니다. 그에 대항하는 스미모토의 세력은 아와로부터 원군이 오기로 했지만, 이시점에는 아직 도착하지 않아, 총원 6천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후나오카산에 구축한 진지도 채 완성되지 않았었지요. 게다가 스미모토가 내걸고 있는 쇼군 요시즈미도 전투 전에 병사해 버렸습니다. 수적 열세와 낮은 사기를 견디고서 스미모토의 군대는 어떻게든 견뎌보려 하지만 차츰 열세에 몰리지요. 이윽고, 마사타카를 시작으로 유명한 무장들이 퇴각 해, 스미모토는 셋츠에 패주합니다.
후나오카산 전투는 타카쿠니 측의 승리가 되어 사실상 수도는 타카쿠니가 통치하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이 전투의 뒤 요시오키는 약 10년간 고국을 보좌하기 위해서 교토에 거주하게 됩니다. 그 사이에 각지의 전국 무장이 군웅할거 하는 난세의 시대로 변화해 관동에서는 호조 소운이 등장하고 관서에서는, 요시오키가 부재중으로 하고 있던 오오우치가의 앞에 숙적 아마고가가 세를 불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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