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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묘오의 대지진으로 호조 소운이 전면에 등장

일본 전국시대;

묘오의 대지진으로 호조 소운이 전면에 등장



 묘오7년(1498년) 8월 25일, 토카이도해(東海道)에 추정 매그니튜드 8. 3의 대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쿠마노모토궁(熊野本宮)



 묘오 7년 지진으로 인해 쿠마노모토궁(熊野本宮)의 신전이나, 나치(那智)의 방사가 파괴되었습니다. 후에, 묘오 지진으로 불리는 대지진입니다. 이 지진에 의한 해일도 매우커서 가마쿠라 대불을 납입하고 있던 대불전이 해일로 파괴되어 이후 가마쿠라 대불은 지금처럼 밖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왜 지진을 이야기 하느냐 하면, 이 대지진에 의해서 입지를 굳힌 전국 무장이 있습니다. 미증유의 재해에 휩쓸린 사람들에게, 사는 희망을 준 일로, 그 후에 큰 지지를 얻었다고 하는 미담이지요. 천년에 한 번일어날까 하는 재해에 휩쓸린 동북지방에서 민중의 입장에 서서, 재해 대책을 세우고 실천한 지방 영주가 있었다고 하면,  그 사람의 이름이 전국에 울려 퍼져 민중의 마음은 평생 그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은 없겠지요. 



가마쿠라 대불

 이 남자가 바로 호조 소운입니다. 보통, 일개의 떠돌이에서 하극상을 통해 성공한 다이묘의 견본으로 여겨져 온 소운입니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고 교토에 굵은 파이프를 가지는 품격 흘러넘치는 교양인이며, 관동에의 진출도 교토의 막부의 지지가 있었다 또는, 제9대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의 측근에서 이라는 설도 있지요. 가쿠슈인대학의 이에나가 교수에 의하면, 이즈 습격의 최종 단계에, 소운이 아시카가 차차마루에 결정타가 된 것이, 이 때의 대지진으로 피해를 당한 이재민을, 아군에게 붙인 일에 있던 것이라고 합니다.


 교수는 묘오7년(1498년)에 일어난 지진에 의한 큰 해일로 괴멸적인 피해를 받았다고 생각되는 이즈 반도 서부에 있었던 조운은 다음날, 약 500의 군사를 동반하고 스루가만을 건너 아군의 군사는 물론, 재해 한 사람들의 구호 활동을 재빠르게 실시하는 것과 동시에 차차마루가 점령하고 있던 반도 남부의 신네성(深根城)를 공격했다고 합니다. 소운이 이즈 일국을 손에 넣을 때 이미 영주 지배하에 있는 백성의 마음을 단단히잡고 있었다고 하는 일은 알고 있었지만, 게다가 구호 활동을 최우선으로 한, 강력한 리더의 모습이 있었다면, 그가 쉽게 이즈전역을 점령한 것도 신기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