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이쓰쿠시마 전투(1) 이쓰쿠시마 전투의 서막
코우지 원년(1555년) 스에 하루카타(陶晴賢)측의 카미료쥬(神領衆)들이 아키 오가타, 오오타케에서 작은 배 7~80척에 나눠 타고 모리 모토나리측의 이쓰쿠시마(厳島)를 공격했습니다.
전국시대 스오우의 오오우치가와 이즈모의 아마고가가 격전을 벌이고 있던 츄고쿠 지방에 모리 모토나리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오오우치가의 중신인 스에 하루카타가 모반을 일으켜 실권을 잡습니다. 이 때 스에측에 서서 함께 오오우치가를 공격해 세력을 확대한 모토나리였지만 실은 고쿠진이었던 자신을 등용해준 요시타카에 약간이나마 은의를 느끼고 있어 마음 속에서는 이 모반을 기분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재빨리 오오우치가의 가신단을 장악 하고 모반을 결행한 하루카타에 모토나리가 거스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것은 모토나리 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카타의 모반으로부터 3년 후의 텐몬23년(1554년) 이전에는 오오우치가의 가신이었던 이와미의 고쿠진 영주 요시미 마사요리(吉見正頼)가 하루카타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요시미 마사요리(吉見正頼)
마사요리와 하루카타에게 동시에 원군의 요청을 받는 모토나리는 양자의 동향을 보면서 기회를 가늠합니다. 이윽고 하루카타가 요시나가를 받들어 마사요리의 본거지 쓰와노성(津和野城)으로 출진했을 때, 하루카타로부터 배반을 결의하고 군사를 일으켜 재빠르게 은광이나 카나야마성(銀山城) 등, 아키 남서부의 성들을 점령하고 이쓰쿠시마도 제압했습니다. 한편 모토나리의 움직임을 안 하루카타는 조속히 부하 미야가와 후사나가(宮川房長)에 군사 3,000을 맡겨 모토나리의 본진을 공략시켰습니다. 그러나 모토나리는 손쉽게 승리해 기세등등하게 본거지 코오리야마성으로 귀환했습니다. 하지만 계속 이대로 돌진할 수는 없습니다. 상대는 명문 오오우치가의 병력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하루타다. 수로 하면 무려 몇 만이라고 하는 군사를 동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한편의 모토나리는 아무리 노력해봐여 겨우 4,000 정도 온전히 싸워서는 승산이 없습니다.
이쓰쿠시마의 위치당시 성들의 위치
하지만 모토나리는 차분하게 작전을 짭니다. 우선 쿠바성주의 쿠바 카타시게(久芳賢重)나 사쿠라오성(桜尾城)의 성주였던 모우리 요소우(毛利与三)등에 큰 돈을 주어 수중에 넣은 뒤 하루타다의 심복인 에라 후사히데(江良房栄)까지도 아군으로 끌여들이는 일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후사히데는 스스로의 중요성을 알아 모토나리에게 돈뿐만 아니라 영지를 달라고 합니다. 모토나리와 장남 타카모토는 후사히데의 이런 태도에 격분합니다. 모리의 피같은 영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태도는 하루타다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배신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 재빠르게 작전을 변경합니다. 모리가에 잡입했던 세작을 역이용하여 후사히데의 배반을 하루타다에게 알립니다. 이에 분노한 하루타다는 후사히데를 죽이고 말지요. 다른 설로는 후사히데는 배신을 하지 않았으나, 세작에 건 계략에 넘어가 의심에 빠진 하루타다가 후사히데를 죽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도 아직 하루타다의 군세는 매우 강성했습니다. 매우 넓은 평지에서 온전히 싸워서는 승산이 없기 때문에, 지름이 불과 29 km, 게다가 산투성이의 이쓰쿠시마로 그 대군을 꾀어내고 생각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때 기습하면, 반드시 이길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오우치가는 지금까지 아키에 진공할 때 이 이쓰쿠시마를 중계 기지로 하고 있었고, 또 하나의 츄고쿠의 영웅 아마고가가 아키를 공격할 때에도, 여기를 중계지점으로 해서 쳐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즉, 이 이쓰쿠시마를 제압하면, 그 주변의 해상권을 통제할 수 있어, 아키를 공격할 때의 군사의 수송이나 자금의 수송이 배로 가능해져 매우 편리해 지는 요충지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하루타다 모반을 도와 모리가 손에 넣은 쿠사츠성등의 아키 남서부를 만회하기 위해 만일 육로에서 진공해 올 경우도 고려해야 했지요.
이쓰쿠시마의 모습
여기서 모토나리는 코우지 원년(1555년)의 초봄 우선, 육지의 최전선이 있는 카토야마성(門山城)을 파괴하고, 조금 철퇴함과 동시에 이쓰쿠시마에 일부러 눈에 띄는 장소에서 미야오성(宮尾城)을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이 상태를 본 하루타다는 카미료쥬들을 아키 오가타, 오오타케에서 작은 배 7~80척에 나눠 타고 이쓰쿠시마를 공격하게 합니다. 하지만 모토나리가 원하는 것은 하루타다의 대군세이기 때문에, 제대로 상대하지 않는 소규모 전쟁이 이어졌습니다. 5월에 미야오성이 완성되었고, 하루타다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해, 전국 3대 기습 중 하나인 이쓰쿠시마 전투의 서막이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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