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제1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의 전초전 시라시나 야와타 전투

일본 전국시대;

제1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의 전초전

시라시나 야와타 전투


 텐몬 22년(1553년) 다케다 신겐에게 카츠라오성을 빼앗긴 무라카미 요시키요가 신겐의 진을 습격한 사라시나 야와타 전투(更級八幡の戦い)가 있었습니다. 이를 일반적으로 제1차 가와나카지마 전투로 간주하는 듯 합니다.



 에치고의 수호인 우에스기가 부하 수호대 나가오 다메카게가 하극상으로 우에스기의 실권을 빼앗아 에치고의 지배에 나서지요. 다메카게의 사후 형제 사이 상속자 분쟁이 일어나고, 거기서 승리해 카스가야마성(春日山城)에 들어온 것이  바로 나가오 가게토라, 후의 우에스기 겐신입니다. 그러나 겐신이 상속한 무렵 아직 에치고의 북쪽에는 아가키타슈(揚北衆)라고 불리는 고쿠진들이 독자적으로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분 상태가 계속 되고 있어 겐신은 에치고 밖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그 무렵 가이의 다케다 신겐이 영지 확대를 위해 시나노에 진공해 스와 요시스게를 물리치고 다음으로 모리성(林城)의 오가사와라 나가토키(小笠原長時)와 카츠라오성의 무라카미 요시키요를 노립니다. 특히, 무라카미 요시키요에게서 패배한 우에타바루의 전투의 설욕을 결심하지요. 신겐은 2년 뒤 모리성을 공략하고 나가토키는 요시키요에게로 도망칩니다. 텐몬 22년(1553년) 드디어 나가토키와 요시키요을 토벌하기 위해 출진한 신겐은 요시키요의 카츠라오성을 포위합니다.




 이 때, 요시키요는 싸우지 않고 탈출해 겐신을 의지해 에치고에 피신 합니다. 실은, 그저께 쓴 카와코에야전으로 인해 호조에 진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노리마사도 영지를 잃어 이 일년전에 겐신을 의지해 에치고에 피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키타시나노에 옛부터 살던 고쿠진들도 신겐의 진공에 대항해 동맹을 맺어 요시키요의 산하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시키요가 에치고로 도망쳤기 때문에, 그들도 겐신을 의지하는 일이 됩니다. 이때 간신히 내분을 수습하고 주변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생긴 겐신에게 있어서는 이 기회는 놓칠 수 없는 것인데다, 도리를 중시하는 겐신을 뒷받침 하듯 '신겐의 침략 행위에 의한 출병'이라고 하는 대의명분도 있었지요. 사실 신겐이 카츠라오성을 점령하면 제일 곤란한 것은 겐신입니다. 카츠라오성과 카스가야마성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아 공격 범위내에 들어가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아군인 요시키요와 그 부하인 고쿠진들의 영지를 되찾아 그들이 그 근처를 지켜 주고 있으면 카쓰가야마성이 위협에 노출되는 일이 없어지겠지요.





 이렇게 해서 겐신은 신겐과 싸우기로 합니다. 겐신 24세, 신겐33세 전국시대 최강의 라이벌이 여기서 탄생합니다. 요시키요는 먼저, 자신의 카츠라오성을 탈환할 수 있도록 행동을 취합니다. 텐몬 22년 겐신을 의지해 무사히 달아난 키타시나노의 고쿠진들과 겐신으로부터 받은 5000의 군사를 동반하고, 요시키요은 출진해 시라시나 야와타에 포진 하고 있던 다케다군의 선봉을 습격합니다. 급습에 밀려 다케다군은 퇴각합니다. 무라카미군은 그 기세를 몰아, 카츠라오성으로 향해 카츠라오성의 탈환에 성공합니다. 이 전투에 겐신이 출진하고 있었는지는 불명합니다만, 겐신의 존재가 전쟁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틀림없습니다. 


 신겐은 카츠라오성에 있던 군사를 빨리 퇴각시켜 가이로 돌아옵니다. 태세를 정돈해 최고의 상태로 겐신과 싸우기 위해서 이지요. 3개월 후, 신겐이 인솔하는 1만의 군세는 요시키요가 지배하는 시오타성을 시작으로 하는 주변의 지성을 차례차례로 점령해, 가와나카지마까지 북상하고 그 소식을 들은 겐신은 8,000의 군사를 거느려 카스가야마성을 출진해 가와나카지마로 향합니다. 그리고 제1차 가와나카지마의 전투의 후반전인 후세 전투로 돌입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