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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모리 데루모토의 히로시마성 축성시작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모리 데루모토의 히로시마성 축성시작



 덴쇼 17년(1589년) 4월 15일, 모리 데루모토가 히로시마성의 축성에 착수했습니다. 



히로시마성(広島城)



 선대 모리 모토나리의 '화살 세 대의 가르침(三矢の教え)로 유명한 아키의 전국 다이묘 모리 가문. 그 모토나리 아마고 가문의 일개 고쿠진이었을 무렵으로부터, 산요, 산인에 일대 세력을 자랑하는 대영주가 되고, 그 손자 데루모토가 뒤를 이은 때까지, 모리의 본거지는 쭉 코오리야마성(郡山城)이었습니다. 코오리야마성은 산간에 만들어진 산성으로, 그 지형을 살려 난공불락이라고 구가해진 견고한 성입니다. 모토나리 아마고 가문에서 독립하는 계기나 된 아키산성 공방전에서도 오오우치의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4개월간, 아마고의 총원 3만이라고 하는 대군을, 불과 8천으로 지켜낸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됴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하고, 정권이 안정되며 전투 자체가 거의 없어지자 성도 바뀌어갑니다. 산성은 방어에야 유리하지만, 물류에는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시즈가타케 전투(시즈가타케 전투) 뒤에, 천하를 손에 넣은 히데요시의 산하가 된 데루모토 덴쇼 16년(1588년), 처음으로 상경해 히데요시를 알현 합니다. 그 때 그는 히데요시의 오사카성과 대저택을 봅니다. 큰 굴과 강고한 돌담에 지켜지면서 주위의 발달한 수운을 살려, 성을 경제적으로 발전시키며, 마을과 함께 돋보이는 오사카성. 관이라고 칭하면서도, 훌륭한 천수각과 본격적인 성곽을 가져, 그 권세를 자랑하는 것 같이 빛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영한 대저 쥬라쿠(聚楽). 이 두개는 모두 히라죠오(平城)입니다.


 새해가 밝은 1월 19일, 데루모토는 새시대의 새로운 성을 건축할 결의를 합니다. 새로운 성의 건설지로 선택된 것은, 당시 고카(五箇)로 불리고 있던 오타가와(太田川) 하구의 삼각주였습니다. 이 땅은 후에 히로시마로 불리는 곳입니다. 덴쇼 17년(1589년) 4월 15일에 착공된 축성 공사는, 삼각주라는 지반의 약함에서 난항을 거듭합니다만, 데루모토는 장래의 수운의 발달을 내다보았는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성은, 풍부한 수량을 안은 수로를 가지는 훌륭한 성이 됩니다.




풍부한 수량을 가진 수로를 지녔지요




 그는 동시에 성시의 정비에도 힘을 씁니다. '히로시마에 가면, 무엇인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라는 소문을 퍼뜨려 사람이 성에 모이고, 한층 더 돈도 성에 모여 옵니다. 아직 건설 도중이던 히로시마성을 방문한 히데요시는, '훌륭하다! 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영한 대저보다 뛰어나지도, 뒤떨어지지도 않는다!' 고 극찬했다고 합니다. 좀처럼 사람을 칭찬하지 않는 히데요시가 극찬할 정도 였으니, 필시 훌륭한 성이었던 것입니다. 이윽고, 게이쵸 4년(1599년), 11년동안의 축성을 끝내 히로시마성은 완성합니다. 그러나, 그 완성의 다음 세키가하라의 전투가 발발하지요. 서군의 대장이 된 데루모토는 전투 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밀약을 주고 받아 출진하지 않지만, 이 밀약은 보기 좋게 찢어집니다.


 이에야스에 의해서 모리의 영지는, 스오우, 나가토만 남게 되어, 히로시마성은, 시즈가타케의 7본창으로 그 이름을 달린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끝까지 저항하자는 가신들에게, 판세를 읽은 데루모토는 설득해 후쿠시마성을 내주게 됩니다. 10여년이나 총력을 기울인 모리의 새로운 성은 채 1년도 소유하지 못하고 남의 손에 넘어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