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다와라 정벌의 서막, 호조의 나구루미성 탈취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다와라 정벌의 서막, 호조의 나구루미성 탈취



 덴쇼 17년(1589년) 10월 23일, 호조 우지나오(北条氏直)의 가신으로 누마타성(沼田城)을 맡는 이노마타 쿠니노리(猪俣邦憲)가 사나다의 나구루미성(名胡桃城)을 탈취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원래 가이의 다케다의 가신이었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덴모쿠산에서 다케다 가쓰요리가 할복(다케다가 멸망하다) 해 다케다가 멸망 한 후, 다케다의 옛 영토 승자인 오다 노부나가의 것이 될 것이라 생각해 오다의 가신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부나가가 불과 3개월 후의 덴쇼 10년 6월에, 혼노지에서 쓰러져 버립니다.(혼노지의 변) 그로 인해 구 다케다령은 눈 깜짝할 사이에 미카와의 도쿠가와,사가미의 호조, 에치고의 우에스기 3강의 표적이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 유키쓰나(幸綱)의 시대부터, 본거지의 시나노의 치이사가타(小県)와 우에노 동부에 위치하는 누마타령(沼田領)을 가쓰요리 때부터 맡고 있던 사나다 마사유키는 본래 독립을 꿈꾸었지만, 어쩔 수 없이 호조의 가신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호조와 교전 중이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치이사가타와 누마타는 물론 우에노의 미노와(箕輪)와 시나노의 스와군을 주겠다는 권유가 있어, 불과 2개월 후의 9월에 도쿠가와의 가신이 됩니다. 그런데 이에야스는 10월에 호조와 화목을 맺어 버립니다. 게다가 그 조건이 '구 다케다령 쟁탈전에서 손을 떼는 대신에, 관동의 우에노령을 전부 호조에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에노령 전부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누마타령이 들어가 있습니다. 누미타령은 마사유키가 아버지와 함께 자력으로 누마타성을 점령해, 호조에게서 차지한 장소로 이에야스가 '호조에 돌려줘라'라고 해도,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누마타성의 반환을 계속 거부하면서, 후에 거성이 되는 우에다성(上田城)의 건설에 착수하는 마사유키였지만, 정확히 이즈음, 덴쇼 12년(1584년) 3월부터 시작된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두고 이야에스와 히데요시 사이에 고마키나가쿠테 전투(고마키나가쿠테 전투)가 발발합니다. 이에 도쿠가와는 사나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 해 11월에 이 전투가 노부나가의 삼남 오다 노부오가 히데요시와 단독 담화로 막을 내렸습니다.(고마키나카쿠테의 종결이윽고, 다음 해의 4월에 이에야스는 보류하고 있던 반환 요구를 재개했습니다. 위기감을 안은 마사유키는 그해 7월, 3강의 나머지의 한 명인 에치고의 우에스기 카게카츠에게, 차남 벤마루(弁丸: 후의 유키무라)를 인질로 보내고 친교가 깊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에 격노한 이에야스가 드디어 사나다 토벌에 착수하니, 이것이 제1차 우에다 전투인 카미카와 전투 입니다.(우에다성 공방전)

우에다성(上田城)


 훌륭한 게릴라 작전으로 도쿠가와의 총공격을 주고 받은 사나다군에다 도쿠가와의 중신 이시카와 가즈마사가 히데요시에게로 가버리 충격으로 동요한 이에야스가 군세를 돌린 일로 사나다는 우에다성을 지켰습니다. 그 후, 마사유키는 우에스기의 인질이 되고 있던 벤마루를 이번에는 히데요시의 아래로 보내, 히데요시의 산하가 됩니다. 이때 히데요시는 우호적인 태도로 '안심해라'하고 있었지만, 실은 이야에스에게도 '안심해라'라고 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여동생 아사히 히메를 도쿠가와에게 보내 복속시키려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데요시의 중재로 덴쇼 17년(1589년) 봄 마사유키와 이에야스는 화해합니다. 둘다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누마타령의 문제는, 3분의 2를 호조에 반환해, 나머지의 3분의 1에다 미노와를 더해 마사유키의 영지로 하는 대신 호조 우지나오도 히데요시의 산하가 됩니다. 그리고 그 증명으로 오사카성에 인사를 오도록 요구합니다. '우지나오 마저 신하가 된다면' 이라고, 누마타성을 내줄 결의를 한 마사유키는 누마타성에서 손을 떼, 토네가와(利根川)를 사이로 맞은 편에 있는 나루구미성 가신 스즈키 시게노리(鈴木重則)를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호조의 호조 우지쿠니(北条氏邦)의 가신 이노마타 쿠니노리가 누마타성에 입성 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반년도 경과하지 않는 덴쇼 17년(1589년) 10월 23일, 쿠니노리는 돌연 나루구미성을 습격해 빼앗아 버렸습니다.



나구루미성 터



 호조의 권유로 그 때, 성을 부재중으로 하고 있던 시게노리는 속은 것을 알고는 할복을 해 자신의 무고를 알렸습니다. 마사유키에겟서 이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자신을 무시한 호조의 처사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이 나구루미성 탈취 사건이 계기로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이 개시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오다와라 공격때 히데요시는 대영주 이에야스를 필두로 부하의 유명한 무장들 중에, 성을 빼앗겨 세력이 엄청나게 작아지고 있던 마사유키에, '나카센도우(中山道)의 선수는 너에게 맡긴다.'라고 했습니다. 지리적인 이점과 함께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그를 잘 기용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의 아들 사나다 유키무라도 여기서 대활약을 하며 명장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