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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다테 마사무네 '오슈의 패왕'이 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다테 마사무네 '오슈의 패왕'이 되다 



덴쇼 17년(1589년) 11월 4일, 센도칠군(仙道七郡)의 이시카와 아키미츠(石川昭光)가 다테 마사무네의 산하에 들어왔습니다. 


 덴쇼 17년(1589년) 6월 5일의 스이아게하라(摺上原) 전투로 승리를 거둔 외눈의 영웅 다테 마사무네, 한편 아시나 측은 그 퇴로가 강에 막혀 많은 희생자를 내 버렸습니다. 총대장의 아시나 모리시게(芦名盛重)는 어떻게든 거성 쿠로카와성(黒川城)으로 돌아와 분명히 쳐들어 올 다테군에 대해, 농성할 지, 혹은 또 군세를 정비해 요격할 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물론, 승리한 마사무네도 아시나 가문을 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성으로 돌아온 모리시게의 군세를 추격 해야 했습니다. 마사무네는 일단 이나와시로성(猪苗代城)으로 돌아와, 자군을 쉬게 하는 것과 동시에 적의 정보 수집을 개시합니다. 그러나, 그런 마사무네의 아래로 도착한 소식은 아시나의 자멸이었습니다. 



오슈



 모리시게 자신은 만회를 도모하려 했으나 군의에서는, 설욕전은 커녕 농성을 호소하는 가신조차, 한명도 없었습니다. 실은, 이 모리시게는 이웃나라 사타케 요시시게(佐竹義重)의 아들로, 아시나에는 양자로 들어왔었지요. 이시나의 가신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주군도 아니었던 것이 함부로 설치다가 아시나 가문을 망친 꼴이 되었기에,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즉, 할복으로 책임을 지거나 너네 아빠한테 돌아가라고 압박을 넣고 있었지요. 게다가 마사무네에게 항복 하는 사람이 속출합니다. 


 결국 전투 뒤 불과 5일 후인 10일에 모리시게는 얼마안되는 수행원을 데리고 친가의 사타케 가문으로 도망칩니다. 이에 마사무네는 당당히 쿠로카와성에 입성 한 것은 그 다음날이었습니다. 18세에 당주에 올라, 그 다음 해 아버지의 죽음(다테 테루무네 납치사건)를 겪고 나서, 불과 4년만에 이뤄낸 것입니다. 마사무네는 곧바로 거성을 요네자와성(米沢城)에서 쿠로카와성으로 옮깁니다. 약간의 저항은 있었지요. 그의 숙모인 오나미는 얼마 남지 않은 니카이도 세력을 가지고 저항했으나, 부질없었습니다.(스키가와성 공방전)



오슈의 패왕, 마사무네



 그런 가운데 덴쇼 17년(1589년) 11월 4일, 이시카와성(石川城)을 거성으로 하는 이시카와 아키미츠가 다테에 복속하는 일을 표명합니다. 이것으로, 마사무네는 센도칠군의 대부분을 산하에 거둔 형태가 되었습니다. 이 때의 테루무네의 영지는, 무츠(陸奥), 데와(出羽)등을 합해 66군 중 약 반을 차지했습니다. 확실히, '오슈의 패왕(奥州の覇王)'이라고 부르기에 어울리는 대 다이묘가 되었습니다. 다음 해의 정월 7일의 렌카회에서는 아래와 같은 승리선언을 하기에 이릅니다.


七種を 一葉によせて つむ根芹

칠종을 한 잎새에 대어 쌓은 미나리 


 정월의'칠'종을 센도 '칠'군에 비유하고, 그것을 쌓아 미나리 즉, 자신의 영지로 했다는 기쁨을 표현한 것이비다.아직 23세의 젊은이이기 때문에, 단 5년에 오슈의 반을 손에 넣을 수가 있던 것이라면, 앞으로 몇 십년 있는 인생에서 천하를 잡는 것도 꿈도 아니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도 무리는 없습니다. 그 젊음의 혈기로 그는  아시나 가문과 친분을  쌓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재삼의 상경 요청을 거절한다고 하는 무모해 보이는 행위로 이어집니다. 아마, 관동에 군림하는 호조 가문이 있다면 히데요시가 오슈에 손을 대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이즈음 호조가 위험해집니다. 시코쿠, 큐슈를 평정 해, 에치고의 우에스기 카게카쓰와도 주종 관계를 묶은 히데요시는(우에스기 카게카쓰 상경하다), 이미 덴쇼 14년(1586년) 11월 4일부로 '관동총무사령(関東惣無事令)'을, 다음 덴쇼 15 년 12월 3일부로 '오량국총무사령(奥両国惣無事令)'을 반포하고 있었습니다. '총무사령'이란, '다이묘끼리 사적인 분쟁을 해선 안 된다'고 하는 명령으로, '안쪽 양국(奥両)'은 무츠와 데와의 일입니다. 결국, '관동에서 토호쿠까지 일대에 있는 무장들은 전국시대처럼 마음대로 전투하지 말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사무네가 센도칠군을 장악 한 덴쇼 17년과 같은 해의 10월 23일에는, 호조 그 '총무사령'을 무시하고, 사나다의 나구루미성을 탈취한다고 하는 사건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나구루미성 탈취) 이것은, 결과적으로 호조를 정벌할 구실을 찾던 히데요시에, 오다와라성을 공격하는 명분을 주어 버리는 일이 됩니다. 하지만 확실히 이 시점에서는 호조와 다테가 연합하면, 히데요시에 대항할 수 있을지도 모르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이윽고, 시작된 오다와라성 총공격의 때, 마사무네는 이대로 히데요시의 상경 요청을 계속 거절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온순하게 히데요시의 산하가 되는지의 둘 중 하나의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