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다케다가 멸망하다
덴쇼 10년(1582년)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에 추적당하던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가 처자와 함께 가이 덴모쿠산(天目山)에서 할복 했습니다.
덴쇼 3년(1575년)에 일어난 나가시노 전투(나가시노성 공방전)에서 일반적으로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이, 가쓰요리가 인솔하는 다케다군에 압승한 것 같이 그려지는 유명한 전투입니다. 하지만 전투가 8시간에 달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한 쪽의 압승이라기 보다는 일진일퇴의 격전이었을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이 전투로 바바 노부하루, 야마가타 마사카게, 나이토 마사토요 등 신겐 때 부터의 중신들이 죄다 전사한 것도 사실입니다.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의 초상화
산간벽지 가이에서 발호해 전국 다이묘가 된 다케다 신겐 덕에 가쓰요리는 늘 부담을 안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넘기위해 분전하면 지나친 무리를 한다고 비판 받고, 만약 조심해 물러나면 아버지에 미치지 못하는 겁장이라고 비웃음을 샀지요. 이럴 때일 수록 아버지의 평판에 신경을 쓰지 말고, 본인이 꿈꾸는 이상을 위해 움직였어야 겠습니다만,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나가시노 전투이후 가신들은 원래 안고 있던 불안감이 심해져 크게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가쓰요리는 나가시노로 전사한 무장들의 가족이나 친척에게 자리를 계승시켜, 다케다 군단의 재편성에 힘을 쏟지만, 아버지 대의 무적이라 구가되던 군단의 수준까지는 끌어올릴 수 없었습니다.
노부나가의 세력이 갈수록 강성해 지자 가쓰요리는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에치고의 우에스기 겐신, 사가미의 호조 우지마사와 동맹을 맺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거성 신푸(新府)성의 구축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성이었던 신푸성 구축은 쿠니진과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어, 결국 가쓰요리는 가신과 백성의 지지를 잃고맙니다. 덴쇼 9년(1581년), 가쓰요리가 아버지가 못한 일을 해낸 영광의 상징 타카마 카미성을 이에야스에가 점령해 버리자(타카마 카미성 공방전) 더욱 더 많은 가신이 등을 돌립니다. 이 무렵에는 오타테의란(오타테의 란)으로 인해 호조와의 동맹도 끝난데다 동맹인 우에스기는 미타테의 란 이후 상처를 치유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가쓰요리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입니다.
양쪽에서 진퇴양난의 상황에 몰린 다케다
그리고 덴쇼 10년(1582년) 시나노 남부의 무장 기소 요시마사(木曾義昌)가 노부나가측으로 배신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가쓰요리의 동생 마리히메가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보인 이런 처사에 다케다의 동요는 하늘을 찌릅니다. 이를 토벌하려 가쓰요리는 군대를 파견하나 실패하고, 이 기회를 호기로 본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은 물론, 호조까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가 시나노 남부로부터, 이에야스가 스루가로부터, 그리고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는 관동에서부터 진군해 다케다의 다카토성(高遠城)을 목적으로 진군합니다.
이야에스가 포위한 타나카성은 맹장 요다 노부시게(依田信蕃)가 지키고 있어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하고, 결국 기소 요시마사와 아나야마 바이세쓰(穴山梅雪)가 다케다에게서 등을 돌렸다는 소식을 이야에스가 전하자, 노부시게는 대세를 읽고 문을 연 뒤 잠적합니다.(타나카성 공방전) 한편, 끝까지 가쓰요리의 편에 선 무장도 물론 있으니, 바로 니시나 모리노부였습니다.
모리 나가요시(森長可)
다카토성 공격의 선봉에 선 것은 모리 란마루(森蘭丸)의 형 모리 나가요시(森長可)였습니다. 그가 타카토성의 지붕에 올라 지붕을 벗기고 총을 발사하는 것과 동시에, 중신 카가미 모토마사(各務元正)가, 쏟아지는 화살을 피해 성내에 난입합니다. 나가요시가 이 기습 작전을 진행시키는 것과 동시에, 니시나 모리노부(仁科盛信)에 요시마사는 항복을 권유하나, 모리노부는 이를 뿌리치고 죽지요.(다카토성 공방전) 이 뒤에 바이세쓰가 길을 안내해 이야에스는 점차 가쓰요리에게로 향합니다.
다케다의 처, 케이린인
결국 가쓰요리는 후처 케이린인(桂林院)이나 아들 노부카츠(信勝)와 함께 신푸성에 불을 지르고 중신 오야마다 노부시게(小山田信茂)의 거성 이와토노산성(岩殿山城)으로 도주합니다. 방어를 위해 민심을 흔들면서 까지 지었던 신푸성은 한줌의 재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이 시점에서의 가쓰요리의 일행은, 약 500명 게다가 이 인원은 여성과 아이가 포함되 있기 때문에, 정말 가쓰요리는 절체절명에 빠져 오야마다 노부시게만을 의지하고 도망친 것입니다. 어떻게든 이와토노산성에 접근한 가쓰요리 일행을 맞이한 것은 화살과 탄알, 노부시게는 이미 오다 노부나가의 측으로 배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츠치야 마사츠네(土屋昌恒)의 한손으로 천명베기
좌절해 도망치는 가쓰요리에게 남은 것은 단 50명, 다케다의 선조가 할복했었다는 덴모쿠산으로 향하는 그들 앞을 노부나가의 부하 다키가와 가즈마스(滝川一益)가 막아 섭니다. 신겐의 무렵 부터의 중신 츠치야 마사츠네(土屋昌恒)는 주군을 적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가파른 골짜기 언덕에서 한 손으로 담쟁이덩쿨을 잡아 지지하고, 다른 한 손으로 적을 베어 '한 손으로 천명 베기(片手千人斬り)'라는 이명을 얻게 됩니다. 또 다케다에 끝가지 충성한 무장 중 하나인 코미야마토모 하루(小宮山友晴), 그는 나가시노 전투에서 가쓰요리에 지나치게 솔직히 직언했다가 쫓겨났으나, 끝까지 가쓰요리를 포기하지 않고 돌아와 지지했습니다. 이 두 명은 결국 가쓰요리를 지키고 전사했습니다.
타테나시갑옷(盾無鎧)
덴쇼 10년(1582년)의 봄 충신들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뒤에 다케다 가쓰요리는 덴모쿠산에 올라 자신의 갑옷을 벗어 절에 맡십니다. 다케다의 당주임을 증명하는 아름다운 벚꽃이 그려진 '고자쿠라아시오도이 갑옷(小桜葦威鎧)'은 칼이 들지 않는 다고 해 '타테나시갑옷(盾無鎧: 방패가 필요없는 갑옷)'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이 갑옷은 현재 스가타텐진사(菅田天神社)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가쓰요리는 부인 케이린인, 장남 노부카츠와 함께 할복 합니다. 케이린인은 이 때 겨우 19세, 게다가 친가는 호조가로 도망치면 살 수 있었을 지도 모르나 남편과 운명을 함께 합니다. 이렇게 해서 전국 굴지의 명가, 다케다가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일본 전국시대 > 역사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 전국시대; 부전자전? 오다 노부타다의 에린지 토벌 (0) | 2012.12.21 |
---|---|
일본 전국시대; 오다군 호쿠리쿠로 진공하다, 우오츠성 공방전 (0) | 2012.12.21 |
일본 전국시대; 노부나가 다케다를 토벌하다 다카토성 공방전 (0) | 2012.12.21 |
일본 전국시대; 요다 노부시게, 타나카성의 성문을 열다 타나카성 공방전 (0) | 2012.12.21 |
일본 전국시대; 유럽에 다녀온 유럽소년사절단 (0) | 2012.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