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유럽에 다녀온 유럽소년사절단
덴쇼 18년(1590년) 유럽을 방문해 로마교황에게 알현 한 '덴쇼 유럽 소년사절'이 8년 5개월만에 귀국했습니다.
덴쇼 10년(1582년) 떠나, 덴쇼 18년(1590년)에 귀국한 '덴쇼 유럽 소년사절단'. 이 기간 사이에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어, 시즈가타케의 전투에 승리한 하시바 히데요시가 태정관의 자리에 올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됩니다. 크리스트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노부나가와는 다르게 강력하게 크리스트교를 탄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소년사절단이 출발할 때와는 완전히 사회의 분위기가 바뀐 것입니다.
발리그나노(Valignano)
덴쇼 7년(1579년)에 일본을 방문한 예수회의 순찰사 발리그나노(Valignano)는 덴쇼 10년에 귀국할 즈음 일본에서의 포교 활동의 성과를 모국에 가지고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당시는, 오오토모 소린등 크리스찬 영주기 여기저기에 있던 시절인데다 특히 큐슈는 이미 스페인령이나 포르투갈령이이라고 유럽인들은 생각하고 있었기에, 모국에 자랑하고 싶을 수도 있지요. 덴쇼 10년(1582년) 초 발리그나노가 반 억지로 계획을 추진하는 가운데, 당시의 크리스찬 영주의 대표격인 오오토모 소린, 오오무라 스미타다, 아리마 하루노부의 세 영주의 사절이 로마 교황의 아래에 파견되는 것이 결정됩니다.
발리그나노와 네 소년
그리고, 사절단으로 선택된 것이 이토 만쇼(伊東マンショ), 치치와 미겔(千々石ミゲル)의 정사(正使) 두 명과 하라마루친(原マルチノ), 나카우라 줄리앙(中浦ジュリアン)의 부사 두 명으로 합계 네 명의 소년들이었습니다. 쥬리안이 14세로 최연장자이고, 다른 세 명은 13세라고 하는 소년들이었습니다. 네 명은 앞의 세 영주의 친서를 손에들고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처음에서 부터 그들 사이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정사인 이토 만쇼는 오오토모 소린의 조카라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 그냥 혈연이 닿아있는 아이로 조카라 불러 보낸 것으로, 위의 세 영주들도 아주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그들이 가져 간 친서는 발리그나노가 마음대로 제작한 것으로 소린은 그 내용조차 몰랐습니다. 일설에는 그 친서에는 로마 교황에의 복종을 나타내는 내용이 쓰여져 있었다고도 합니다.
로마에 방문한 사절단
즉, 이들은 단순한 포교 활동의 성과로서의 사절이 아니고 유럽에 일본이 복종하는 의지가 있는 일을 의미하는 사절이었습니다. 아무튼, 덴쇼 10년 봄에 나가사키를 출항한 그들은 마카오를 경유해 인도의 고어에 도착해 발리그나노와 헤어진 뒤에, 다시 배를 타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덴쇼 12년(1584년) 여름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마드리드에서 스페인 국왕에 알현 하고나서 지중해를 건너 덴쇼 13년(1585년)에 드디어 로마 교황과 알현 합니다. 그리고, 그 2주일 후에 새로운 교황 시투스 5세(Sixtus V)의 대관식에 출석해 공식의 임무를 무사히 종료했습니다. 그 후, 3개월간 이탈리아에 체재한 그들은 로마의 시민권까지 얻고,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의 존재를 유럽인에 알립니다.
이윽고 귀국의 길에 오른 그들은 인도의 고어로 다시 발리그나노와 합류해, 덴쇼15년 봄에 일본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 항해중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크리스트교를 금지해 버립니다. 덴쇼 18년(1590년) 그들은 일본에 돌아왔습니다. 히데요시에 알현 하는 발리그나노와 함께 당대의 최고 권력자에게 알현한 소년들이었으나,히데요시가에게는 달가운 사람들이 아니었지요. 아무튼 유럽을 그 눈으로 보고 온 그들은 귀중한 존재라 판단해 이토 만쇼에게는 관직을 권합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를 독실하게 믿는 만쇼는 관직을 거절해, 사제의 공부를 하기 위해 루친과 함께 마카오로 향합니다.
치지와 미겔은 병약해 마카오 유학이 불가능해, 일본에 남지만 결국 일본에서 살아 가기 위해 신앙을 버려 개종 합니다. 그러나, 그 후도 친척에게서 소외당해 실의에 싸인 채로 세상을 떠납니다. 마카오로 향한 나머지의 세 명은 사제의 자격을 얻어 귀국합니다만, 박해를 받아 추방되고 큐슈의 각지를 전전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게이쵸 17년(1612년)에 만쇼가 나가사키에서 병사하고 어학에 통달했던 루친은 번역의 일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만, 탄압이 한층 더 심해졌기 때문에 마카오에 출발해 칸엔 8년(1629년)에 마카오에서 병사합니다. 끝까지 크리스찬인 채 일본에 남은 줄리앙은, 칸엔 10년(1633년)에 붙잡혀 처형 당하고 맙니다. 역사의 흐름에 삼켜져, 종교를 추구하다 죽은 이들은 천국에 갈 수 있었을 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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