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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히데요시, 돗토리성을 점령해 모리를 내쫓다

일본 전국시대;

히데요시, 돗토리성을 점령해 모리를 내쫓다



 덴쇼 9년(1581년) 모리의 돗토리성(鳥取城)을 하시바 히데요시가 인솔하는 오다의 군세가 포위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아, 츄고쿠 지방을 공략하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는 덴쇼 6년(1578년) 봄부터, 2년 가까이의 세월을 걸쳐 겨우 벳쇼 나가하루의 거성 미키성을 공략합니다.(미키성 농성전) 미키성을 공략하면서, 히데요시는 타지마나 이나바의 평정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미키성이 함락당하기 직전 히데요시는 당시의 돗토리 성주였던 야마나 토요쿠니(山名豊国)에 '이나바국의 영지를 보증할 테니 오다측으로 오지 않겠는가?'라는 권유를 했습니다. 야마나 토요쿠니는 오닌의 란에서 서군의 장이었던 야마나 소젠의 자손입니다. 이전에는 산인의 수십국을 손에 넣어 일본을 동서로 나눈 대란을 지휘한 명문도 지금은 쇠락했습니다.



야마나 토요쿠니(山名豊国) 초상화



 스스로의 역량을 간파한 토요쿠니는 오다 측에게 항복하는 것을 승낙하려고 합니다만, 야마나의 중신들은 토요쿠니의 의견에 맹반대해 모리의 깃카와 모토하루에 구원을 요구합니다. 모리에게도 영락했지만 명문인 야마나가가 오다측에 들어가게 되면, 츄고쿠 지방의 정세에 어떠한 영향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조속히, 덴쇼 9년(1581년), 모토하루는 깃카와 쓰네이에(吉川経家)를 돗토리성에 성주로 삼습니다. 그는 지성으로 마루야마성(丸山城)을 건설해, 방위를 강화하고 철저 항전의 태세를 보입니다. 이를 알게된 히데요시는, 자신의 부하를 상인으로 변장시키거나 상을 매수해, '교토에 쌀이 없어서 고가로 매입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계략임을 모르는 돗토리성의 장수들은 얼마 있으면 가을이고, 전투를 대비하려면 자금이 필요하니 비축한 쌀을 모두 팔아 버립니다.


마루야마성


 하지만 가을의 수확이 시작되기 전에, 히데요시는 히메지성을 출격해 덴쇼 9년(1581년)에 돗토리, 마루야마의 2성을 포위해 버립니다. 성을 둘러싸는 히데요시의 군세는 3만. 이 포위는 유례없는 엄중한 것이었습니다. 쌀이 없는 성들이 자멸하기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한편, 돗토리성을 지키는 것은 야마나의 옛 신하와 쓰네이에의 군세 2천 정도. 게다가, 그 중의 5분의 1정도를 카리카나야마(雁金山)의 성채에 파견하고 있었습니다. 히데요시가 돗토리성을 포위한 시점에서 이미 그 성채는 점령 당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돗토리 성내는 곧바로 군량미가 부족하게 됩니다. 이는 모리측도 알기 때문에 자랑의 수군을 대동해 해상으로 군량미를 옮기려 합니다. 그러나 해상에는, 히데요시의 수군이 모리의 수군을 격파해 버립니다.


돗토리성(鳥取城)


 그런데도 쓰네이에는 '어떻게든 겨울을 넘으면, 모리의 원군이 온다' 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군량미의 부족은 눈을 뜰 수가 없는 상황까지 갑니다. '혹자는 말을 먹고, 혹자는 사람을 먹는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지요. 그러나 포위하는  히데요시측는 남동생 하시바 히데나가(羽柴秀長)에게 타지마를 공략시키는 여유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윽고, 가을이 끝나가자 더 이상의 농성은 불가능이라고 판단한 쓰네이에는 히데요시에 개성의 의사가 있음을 알립니다. 히데요시는 쓰네이에를 포로로 해 모리와의 교섭 카드로 사용할 생각이었지만, 그는 할복하고 맙니다. 돗토리성을 손에 넣은 일로, 당연히 모리는 그 세력권을 빼앗겨 앞으로의 전투의 무대는, 서쪽의 비젠이나 빗츄로 이동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