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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노부나가의 학살, 제 2차 덴쇼 이가의 란

일본 전국시대;

노부나가의 학살, 제 2차 덴쇼 이가의 란



 덴쇼 9년(1581년) 제2차 덴쇼 이가의 란(第二次天正伊賀の乱)으로 불리는 오다 노부나가의 이가 공격으로, 마지막까지 남았던 카시하라성(柏原城)이 함락 당했습니다.


 다케다 신겐에게는 슷파(出抜), 우에스기 겐신에게는 노키자루(軒猿)라고 닌자 집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역시 핫토리 한조(服部半蔵)를 고용했던 것으로 유명하고,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의 사나다 십용사도 많이 알려져 있지요. 또 호조는 후우마(風魔)가 있었습니다. 여러 닌자들의 이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해 주세요.(

각 지역의 닌자의 이름) 그런데, 오다 노부나가가 닌자를 사용한 이야기는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무슨 짓이던지 필요하다면 서슴지 않는 노부나가가 닌자를 사용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요. 닌자를 사용해 계략을 세우는 것보다 효율적인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노부나가의 닌자가 지나치게 우수했기에 역사에 남지 않을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일을 진행하던 노부나가가 거의 학살 수준의 전투를 벌인 것이 이번 덴쇼 이가의 란이었습니다.



오다 노부오(織田信雄)



 이가는 이세와 다이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소에 있었습니다만, 산 속 깊은 곳에 있었기에, 큰 세력이 미치지 않은 장소였습니다. 각지에서 전란이 반복해진 전국시대라도, 작은 토호가 할거해 전투를 일으키고 영지를 서로 빼앗는 일은 없는데다 오히려 잇키를 일으켜 덴쇼 6년(1578년)에는 수호를 추방해, 독립 자치를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가는 독립적인 닌자마을 이었지요.(일본 닌자의 기원) 그런 가운데, 이세에 진공한 노부나가에 의해서 키타바타케씨에게 양자로 들어가, 가문탈취에 성공한 오다 노부오(織田信雄)는(키타바타케의 최후), 그 기세를 타 아버지 노부나가에게 알리지 않고, 이가 공격을 개시합니다.


 하지만 이가 군단의 게릴라 전법으로 오히려 당해 패퇴하니 이것이 제1차 덴쇼 이가의 란 입니다. 무계획적인 공격을 한 바보 아들에게 격노하는 노부나가이지만 동시에 귀여운 아들의 생명을 위협한 이가 군단에도 분노를 안게 되지요. 노부오의 패주로부터, 정확히 2년 후의 덴쇼 9년(1581년) 천하 통일을 눈앞에 둔 노부나가는 대량의 군사와 함께 노부오를 총대장으로 삼아 이가 공격을 개시합니다. 이 때, 하시바 히데요시가 츄고쿠 방면에서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가 호쿠리쿠 방면에서 분전중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참가하지 못했지만, 다키가와 가즈마스(滝川一益),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 호리 마사히데(堀政秀), 츠츠이 준케이(筒井順慶), 아사노 나가마사(浅野長政)와 나머지의 오다군을 총동원한, 약 4만 5천의 대군을 준비합니다. 



카시하라성(柏原城) 재현



 영주도 아닌 쿠니진의 잇키가 아무리 게릴라 작전을 구사해도,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을 만큼의 대군으로의 진공한 오다군은 이가로 진입하는 중요한 길 4개 곳으로 군세를 나누어 진공시켜, 모든 것을 다 태워 버리는 철저한 말살 작전을 결행합니다. 북쪽 이가의 아마코우산(雨請山) 성채에는 이나마스(稲増)가가, 서쪽 이가의 히쟈산(比自山) 성채에서도, 각각의 토호들이 게릴라 작전으로 저항합니다만, 작은 성채는 차례차례로 점령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것이 총대장 다키노 요시마사(滝野吉政)와 모모치 탄바(百地丹波) 이하 1,600명이 농성하는 카시하라성이었습니다. 덴쇼 9년(1581년) 점령당하기 직전의 카시하라성에 노부나가는 항복을 요구해 요시마사는 스스로의 장남을 노부오에 맡기는 조건으로, 카시하라성을 개성합니다.


 진공 하고 나서, 불과 2주간 미만으로 이가는 평정 되었습니다. 이전에 오다군이 반복한 살륙은 남녀노소 하루 300명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이가를 다 태우는 그 불길은, 멀리 나라에서도 보였다고 하네요. 코후쿠지의 승려의 일기에는 '이가 일국이 눈 깜짝할 순간에 소멸했다' 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 때, 도망치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생각해 놓쳐 준 츠츠이 준케이는 후에, 노부나가에 격렬하게 질책 당했습니다. 복수가 반복되는 전국시대에 노부나가의 이러한 잔혹한 몰살을 옹호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정 이해 안가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하자마자 카사하라성에 다시 모여 제 3차 덴쇼 이가의 란이 일어나기도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