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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가문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시고쿠의 패자, 쵸쇼카베 가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시고쿠의 패자, 쵸쇼카베 가문



 전국시대의 초첨은 언제까지나 교토를 비롯한 기나이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큐슈나 시고쿠의 전국시대는 주목을 덜 받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국시대 시고쿠에서도 큰 혼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고쿠의 패자가 되었던 것이 다름아닌 쵸쇼카베 가문입니다.


나나츠카타바미七つ酢漿草


쵸쇼카베 가문의 성립


 쵸소카베 가문은 하타(泰) 가문의 후예를 자칭하고 있었습니다. 하타 가문은 고대의 유력 가문으로, 진황제의 자손인 유즈키노키미(弓月君)가 일본에 도착해 세운 가문입니다. 하타 가문은 야마시로 국의 카도노군 일대를 영유했고, 우즈마사(太秦)를 본거지로 세력을 쌓아 나갔습니다. 후에 쇼토쿠 태자를 모시며, 세력을 한 층 더 강하게 만들어 나갑니다.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일어난 죠큐(承久)의 난에서 막부 측에 섰기에, 하타 가문의 분가는 토사의 지도우(地頭)가 되어, 쵸소카베 마을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상기의 이야기는 한 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냥 시골의 유력자가 쵸쇼카베 가문으로 발전하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쵸쇼카베 가문은 남북조 시대 등을 거치며 기도소, 사봉행 등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고쿠 토사국의 수호다이는 쇼군이 내린 호소카와 가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닌의 란 등을 비롯해 호소카와 가문이 부하들을 이끌고 교토에 올라가자, 시고쿠 내부는 점차 토호들이 발호하게 됩니다. 이와중에 쇠락한 호소카베 가문을 의지해 쵸쇼카베 가문은 세력을 확대시켜 토사 7족(土佐七族)의 영웅이 됩니다. 이 혼란의 와중에 이치죠 노리후사(一条教房)가 교토의 혼란을 피해 시고쿠로 옮겨 옵니다.(이치죠 노리후사의 시고쿠 이동) 이에 쵸쇼카베 가문은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그를 고쿠시(国司)로 맞이할 것을 제안해, 토사는 일시적으로 평온을 맞이하게 됩니다.



쵸쇼카베 가문의 도약과 몰락


 쵸쇼카베 가문은 이치죠 가문과 일심하여 힘을 길러 나갔으나, 이것은 오히려 주변 영주들에게 큰 반감을 사게 됩니다. '호가호위'라 느낀 것이지요. 쵸쇼카베 카네츠구(兼序)는 무용과 지략을 모두 지닌 훌륭한 무장이자 다이묘 였습니다. 원래 토사를 지배하던 호소카와 가문은 매우 큰 권세를 지닌 가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에이쇼 4년(1507년) 호소카와 마사모토(政元)의 후계자 갈등으로 인해 마사모토가 살해당해 버립니다.(호소카와의 후계자 분쟁) 이에 토사에 다시한번 혼란이 찾아옵니다. 이에 지금까지 독주하던 쵸쇼카베 가문에 대항한 '반 쵸쇼카베 연합'이 결성됩니다. 총 3,000만 대군이 몰려 왔고, 이에 대항하는 카네츠구의 군세는 단 500에 불과했습니다. 카네츠구는 패주를 가장해 적군을 강으로 유인해, 대승을 거두었으나, 병량의 부족으로 거성인 오코성(岡豊城)에서 농성하다가 할복했습니다. 여기서 쵸쇼카베 가문은 몰락하고 맙니다. 이에 전국시대에 돌입한 토사는 오오히라(大平), 모토야마(本山), 키라(吉良), 츠노(津野), 아키(安芸), 코소카베(香宗我部) 가문이 서로 항쟁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일단 이치죠 가문을 고쿠시로 대접을 해줘 큰 혼란은 막아 내었습니다. 이렇게 되서 토사 1국은 '토사 7웅(7수호)'라 불리는 군웅할거의 시대가 됩니다.




쵸쇼카베 가문의 부활



쵸쇼카베 쿠니치카



 오코성이 함락되었을 때, 카네츠구의 적남인 센유마루(千雄丸)는 가신의 보호를 받아 성을 탈출해 냈습니다. 이치죠 가문은 그를 거둬 길러 줍니다. 이후에 이치죠 가문의 도움을 받아 세력을 조금 회복해낸 그는 원복해 '쿠니치카(国親)'라 이름을 고치고 쵸쇼카베 가문을 부활시키려 합니다. 그는 영토를 확장하며 세력을 길러 냅니다. 아버지를 죽인 반 쵸쇼카베 연합의 일익인 야마다 가문을 모략으로 멸문시킨 그는 끊임 없이 세력을 확장해 토사의 영주는 이제 쵸쇼카베를 제외하고는 아키와 모토야마만이 남게 됩니다. 에이로쿠 3년(1560년) 쿠니치카는 나가하마 성(長浜城)을 탈취해 토노모토(戸の本)에서 모토야마와 격돌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쿠니치카의 적남, 쵸쇼카베 모토치카는 큰 공을 세우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냅니다. 그러나 쿠니치카는 급작스레 병사하고 맙니다. 그는 죽으면서도 아들에게 '복수'를 명했다고 합니다.


 가독을 상속한 모토치카 주변의 민심을 손에 넣어 갑니다. 에이로쿠 5년, 모토야마 시게토키(本山茂辰)는 거처하던 아사쿠라 성(朝倉城) 근처에서 영향력을 잃고 거성인 모토야마성(本山城)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시게토키의 아들인 치카시게(親茂)의 대에 그는 결국 쵸쇼카베 모토치카에게 항복하게 됩니다.(모토야마 가문 멸망) 치카시게는 토츠키가와 전투에서 모토치카를 지키고 죽었다니, 모토치카의 인덕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후 모토치카는 키라, 아키, 츠노를 제압해(아키성 공방전) 얼마 뒤 고쿠시인 이치죠의 히타군까지 손에 넣어 토사 1국을 평정하는데 성공합니다.(시만토가와 전투)  이 무렵 그는 분국법인 덴쇼 식목(天正式目)을 제정해, 명실 공히 센고쿠 다이묘로서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이제 그는 시고쿠를 통일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를 지지했던 노부나가가 약속을 어기자, 그들의 군대를 격퇴한 모토치카는(사누키 평정) 이요마저 지배해 시고쿠 전부를 지배하게 됩니다.(이요 평정) 드디어 쵸쇼카베 가문은 염원의 시고쿠 지배를 해 낸것입니다.



쵸쇼카베 가문의 몰락



쵸쇼카베 모토치카 초상화



 하지만 다른 가문들이 그렇듯이 쵸쇼카베 가문은 거대한 적을 만나니, 다름아닌 하시바 히데요시였습니다. 야마자키 전투, 키요스 회의 그리고 시즈카타케 전투를 통해 오다 가문 내의 권세를 얻은 히데요시는 츄고쿠를 정리한 뒤, 시고쿠로 눈을 돌렸습니다. 시고쿠를 정벌한지 불과 1년 밖에 되지 않았으니, 항복은 당연히 불가능한 선택지 였습니다. 결국 쵸쇼카베 모토치카는 가신들의 의견과 대세에 눈물을 훔치며 히데요시에게 항복합니다.(쵸쇼카베 항복) 히데요시는 그의 충성을 시험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큐슈를 치게 합니다.(쵸쇼카베의 큐슈 정벌 참가) 하지만 그의 철전지 원수인 소고 마사야쓰와 함께 공격을 한 끝에 대패하고 말지요. 게다가 모토치카가 사랑하던 첫째아들 노부치카(信親)가 죽어버려 모토치카는 의욕을 잃고 맙니다.


 노부치카의 사후, 히데요시는 차남으로 사누키의 카가와(香川) 가문을 잇고 있던 치카카즈(親和)에게 토사를 완행(宛行)한다는 의미의 주인장(朱印状)을 수여합니다. 그러나, 모토치카 4남 모리치카(盛親)를 귀여워 하고 있어서 후계문제는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모토치카는 모리치카를 후계로 정하며, 이에 간언하는 가신들을 모조리 내쳐 버립니다. 모토치카 사후 그 뒤를 이은 모리치카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서려 하나, 진로가 막혀 서군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야에스에게 사죄를 하기전에, 후한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자신의 형을 죽이니, 이것이 이야에스의 분노를 사 죽을뻔 하나, 이이 나오마사의 간언으로 목숨만을 건지게 됩니다. 


 료닌으로 떠돌던 모리치카는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료닌을 모은다는 소식을 듣고 오사카성으로 들어가 오사카의 진(오사카 여름의 진)에 참가합니다. 야오전투에서 패퇴한 그는 도망치다 붙잡혀 참수형에 쳐해지고, 여기서 쵸쇼카베 가문은 멸망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