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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가문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관동의 패자, 후 호조 가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관동의 패자, 후 호조 가문



전국시대의 가장 큰 특징인 '갑작스런 출세'를 온 몸으로 체현한 가문이 둘 있으니, 바로 사이토 가문(사이토 가문)과 후 호조 가문입니다.

미츠우로코三つ鱗


호조 가문의 성립, 호조 소운의 활약



호조 소운 초상화



 사실 일본사에서 호조 가문은 그 전에도 있었습니다. 전기의 호조 가문은 덴노와 권력투쟁을 했을 정도로 강성한 힘을 가진 가문이었습니다. 이와 구별하기 위해 전국시대의 호조가문은 전기의 호조가문과 비교하기 위해 '후호조 가문' 이라고 부릅니다. 호조 가문을 일으킨 것은 이세 신쿠로 나가우지(伊勢新九郎長氏)로, 후에 '호조 소운'이라고 불리는 인물입니다. 그는 생전에는 스스로를 '호조 소운'이라고 자칭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혼란을 막기 위해 호조 소운으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소운은 자신의 출자에 대해서 밝히지 않았습니다. 단지 에이쇼 3년의 그의 서간에, 이세의 세키(関)와 성씨가 같다고 말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소운의 여동생은 이마가와 요시타다(今川義忠)의 처가 되어, 아들인 류오마루(竜王丸)를 낳았기 때문에 그 식객이 되었고, 요시타다가 불시에 사망하자[각주:1] 류오마루를 옹립해 반대파와 싸워, 이마가와 7대의 가독에 앉히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공에 의해, 스루가 국의 후지 군 소령을 수여받아, 코코쿠지 성(興国寺城)을 거성으로 삼았습니다. 마침 엔토쿠 3년(1491년) 이즈의 호리코시 쿠보(堀越公方)인 아시카가 마사토모(足利政知)가 죽고, 마사토모의 아들인 챠챠마루(茶々丸)가 계모와 이복동생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소운은 재빨리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에게서 스루가 중의 300명을 빌리고, 카츠라야마 우지타카(葛山氏堯)들의 원군을 얻어, 적은 군세로 호리코시 어소를 급습해, 이즈를 탈취했습니다.(이즈습격) 이 이즈습격을 '하극상'의 대표적인 예로 삼아 전국시대의 개막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이즈를 평정한 소운은 니라야마(韮山)에 새롭게 성을 쌓았고, 그곳을 본거지로 삼았습니다. 후에, 묘오 4년,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의 오오모리 후지요리(大森藤頼)를 사슴 사냥을 핑계로 공격해 '화우의 계'로 성을 탈취합니다.(오다와라성 탈취) 이렇게 그는 사가미 제일보를 내딛었습니다. 3년 뒤에는 토카이도에서 일어난 대지진을 원활히 수습한 그는 인심을 한 몸에 받게 됩니다.(묘오의 대지진)그로부터 17년 뒤 미우라 요시아츠(三浦義同)가 농성하던 오카자키 성(岡崎城)을 점령하고(오카자키성 공방전), 그 해에 미우라 반도(三浦半島)의 아라이 성(新井城)에서 요시아츠(義同), 요시오키(義意) 부자를 죽이고 사가미 국의 태반을 평정합니다. 하지만 당시 호조 소운은 83세로, 얼마 뒤 생을 마감합니다.



호조 가문, 관동의 지배자로 올라서다



호조 우지츠나 초상화



 호조 소운의 뒤를 이은 것은 적남 호조 우지츠나(氏綱)입니다. 그는 소운이 나이를 핑계로 죽기 전에 이미 가독을 물려주었기에, 별다른 문제없이 호조 가문을 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세'라는 성을 버리고 이 때부터 '호조'라 자칭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어느정도 기반을 닦은 호조 가문이 자신의 출자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였지 않나 싶습니다. 우지츠나는 호조 가문을 더욱 키워 무사시까지 진공하게 됩니다. 다이에이 4년에는 에도성을 점거하고, 텐분 7년에는 코우노다이 전투에서 사토미 요시타카를 격퇴합니다.(제1차 코우노다이 전투


 3대인 우지야스(氏康) 역시 명군이었습니다. 영내에 검지(検地)를 실시하고, 또 세제를 개혁하는등 민정의 면에서 수완을 발휘해 센고쿠 다이묘로 우뚝 섰습니다. 군사면에서도 텐분 15년, 카와고에 야전에서 숙적인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 토모사다(扇谷上杉朝定)를 죽이고(카와코에 야전),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노리마사(山内上杉憲政)를 에치고로 쫓아내, 칸토에서 양 우에스기의 세력을 일소했습니다. 



호조 우지야쓰 초상화



 우지야스의 부인은 즈이케이인(瑞渓院)으로, 12명의 자식을 낳았습니다. 측실의 자녀까지 15명의 자식이 있었던 우지야스는 적남인 우지마사(氏政)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나머지 자손들도 각각 유효하게 배치합니다. 데릴 사위로 보내거나, 양자로 보내 여러 가문과의 관계를 공고히 한 것입니다. 딸인 하야카와도노(早川殿)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적남인 우지자네(氏真)에게 시집가고, 우지마사(氏政)는 다케다 신겐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이로 인해 맺어진 키요스 동맹은 매우 강력해 관동에 그 세력을 더욱 기를 수 있었습니다.



호조 가문, 몰락의 길을 걷다



호조 우지마사 초상화호조 우지나오 초상화



 우지마사의 아들인 우지나오(氏直)는 덴쇼 10년, 21세가 되었을 무렵부터 실제로 정치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 시점에서는 아버지인 우지마사도 45세라는 젊은 나이여서, 그도 정치에 강하게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그역시 무능한 자는 아니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히데요시의 명을 어기고 나구리미성을 탈취한 호조 가문은(나구루미성 탈취) 히데요시의 분노를 한 몸에 받아, 히데요시는 친히 오다와라 정벌을 단행하게 됩니다.(오다와라 정벌) 호조 우지마사, 우지나오 부자는 죽지는 않았으나 절에 들어가게 됨으로서 센고쿠 다이묘로서 호조 가문은 멸망하고 맙니다.


 그후, 호조 가문의 가독은 니라야마성(韮山城) 성주였던 호죠 우지노리(北条氏規)에 의해 이어집니다. 그의 계통은 1만 1천석의 사야마 번(狭山藩)이 되었습니다.

  1. 물론 호조 소운이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