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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쿠보 괴멸하다 카와코에 야전

일본 전국시대

쿠보 괴멸하다 카와코에 야전



 텐몬 15년(1546년) 전국시대 굴지의 야전 '카와코에야전'이 있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는 관동을 관리하기 위해 가마쿠라쿠보와 그 보좌로 관동 관령을 두었습니다. 가마쿠라쿠보는 아시카가가의 분가가 대대로 맡고 관령직은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가 교대로 맡고 있었습니다. 막부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와 쿠보 4대 아시카가 모치우지때에, 막부에 반발해 쿠보가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요, 이에 막부와 관령 우에스기가가 연합해 쿠보 모치우지를 배제했습니다(에이쿄의 난). 그 모치우지의 아이 아시카가 나리우지(足利成氏)가 쿠보직을 탈환하려고 관동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막부에 무허가로 마음대로 자칭한 것이 코가쿠보입니다. 거기에 막부가 당황해서 파견한 정식적 쿠보가 호리코시쿠보였습니다만, 혜성처럼 등장한 호조 소운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아시카가 나리우지



 이윽고, 앞의 코가쿠보의 3대 아시카가 타카모토(足利高基)의 대가 되어, 그에 반발한 남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明)가 코가쿠보에서 나와 한층 더 무허가가 되는 오유미(小弓)쿠보라 칭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카마쿠라를 지배해 에도성 근처까지 세력을 늘리고 있던 소운의 아들 호조 우지쓰나는 오유미쿠보를 넘어뜨려 관동에 영향력을 한층 더 크게  합니다.(코우노다이 전투) 소운, 우지쯔나의 부모와 자식 2대로 호리코시・오유미쿠보가 멸망하고, 마지막에 남은 것은 코가쿠보였습니다. 텐몬 11년(1541년) 우지쓰나가 병사해 그의 아들 호조 우지야스(北条氏康)가 아버지를 잇습니다. 이 3대째의 호조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이것을 기회라 판단한 것이 코가쿠보와 관령인 양우에스기가입니다.



대략이런 상황입니다



 코가쿠보 4대 아시카가 하루우지(足利晴氏)는 더 이상 호조의 북진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하루우지와 거기에 동조하는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의 노리마사와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 도모사다 등은 그 해의 10월, 관동 중앙부의 호조의 거점인 무사시 카와코에성을 포위합니다. 이 카와코에성은 원래 도모사다가 거점으로 하고 있던 성으로 그것을 우지쓰나가 점령고 사위인 호조 쓰나시게(北条綱成)에게 지키게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우지는 이 기회에 반드시 이 성을 만회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카와코에성의 북쪽에는 하루우지, 서쪽과 남쪽에는 양우에스기가, 동쪽에는 오오타도칸의 증손 오오타 스게마사(太田資正)로 총원 8만이 성을 포위했습니다.  이것은 너무 과장된 것으로 실제는 4만 정도라고 여겨집니다. 카와코에성 안에는 성주 쓰나기세와  3천의 군세, 우지야스가 파견한 구원 부대가 8천으로 1만을 겨우 넘는 정도였습니다. 



카와코에 야전 개요도



 그러나 그 수의 차이에 비해, 쿠보・관령측이 몇 번 공격을 걸어도 카와코에성은 좀처럼 점령당하지 않았습니다. 소규모 전투를 계속하는 중, 텐몬 15년(1546년) 3월 무렵에 하루우지의 군세는 한 번 체제를 다시 정돈해 다시 공략하기로 하고 일시적으로 공격을 중지합니다. 그것을 본 우지야스는 스스로 부대를 인솔하고 성 밖에 나와, 즉석에서 하루우지에게 화목을 신청합니다. 그러나, 이 화목은 적을 방심시키기 위한 작전이였습니다. 부하에게 적진을 정탐시킨 결과 하루우지의 군세는 수에서 큰폭으로 이기고 있으며, 상대가 화목을 신청해 온 일로 ' 이 싸움은 끝날 것이다'라고 완전히 안심했다고 보고합니다. 그 보고를 들은 우지야스는 야습을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늦은 밤 우선은 도모사다의 진에 야습을 걸쳐 쉽게 도모사다를 죽이고  진은 괴멸 상태가 됩니다. 그 기세를 타고, 이번은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진에게 돌입해  적장 노리마사의 목을 치진 못했지만 노리마사의 군세는 패주 해 이쪽의 진도 괴멸 상태가 됩니다. 우지야스의 기습을 안 성안의 쓰나시게는 병사를 이끌고 하루우지의 진을 토벌하러 나옵니다. 갈팡질팡하는 동안에, 완패가 되어 괴멸된 진을 눈 앞에 둔 하루우지는, 호조측에 항복해 이 전투는 호조의 승리로 막을 내립니다. 포위되고 있는 측이 성밖에 도착한 원군과 합해 몇배의 대군을 토벌한 이 전투는 이쓰쿠시마, 오케하자마의 두 개의 기습과 함께 전국 굴지의 야습 '카와코에 야전' 으로서 구가됩니다. 이뒤에 하루우지는 코가쿠보의 자리를 내쫓기게 되고, 이 때, 우에노 히라이성이 피한 노리마사도의 관동 관령은 이름뿐인 지위가 되어 버립니다. 이 노리마사가 우에스기 겐신(나가오 가게토라)에게 몸을 의탁하고, 노리마사의 양자라고 하는 형태로, 겐신이 관동 관령이 되는 것은 이 후, 16년 후의 에이로쿠 3년(1560년)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