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나가사키 26명 성인의 순교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나가사키 26명 성인의 순교



 1597 2월 5일, 나가사키 니시자카(西坂) 언덕에서 26명의 크리스트교도가 처형된 일에 의해, 오늘 2월 5일은“나가사키 26 성인 순교의 날”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일본의 달력으로 이 날은 게이쵸 원년 12월 19일 입니다. 하지만 그레고리력에 의거해 로마 교황청이 제정한 나가사키 순교일은 1597년 2월 5일이기에, 이 날짜로 서술하도록 하겠습니다.



나가사키 26성인 기념비



 게이쵸 원년의 6월에 혜성이 나타나고, 7월에 아사마산에서 대분화가 일어나 그 재가 교토와 히데요시가 있는 후시미까지 이릅니다. 게다가 윤 7월(당시 일본의 역법으로는 7월이 두번이었습니다)에는 킨키지방에 대지진이 일어나고 여진이 2주간이나 지속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8월에는 큰 태풍이 상륙해 버립니다. 이런데다 조선 침략을 하고 있었던 일본의 민심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즈음 명과 조선의 사절과 강화를 타결했으나, 잘 되지 않아 히데요시는 내심 정유재란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태풍이 있던 8월 26일 토사 앞 바다에 스페인의 배 성 펠리페호가 조난당합니다. 이 배는 쵸쇼카베 모토치카가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는 이미 히데요시에 의해 '크리스트교의 포교 활동의 금지'가 이루어지진 후입니다.(크리스트교를 금지하다) 하지만 동시에 난파선은 보호한다고 하는 약속도 하고 있었습니다. 난파한 성 펠리페의 선원들은 히데요시에게 보호와 배의 수리를 위한 지원을 요청하나, 히데요시는 이를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마시타 나가모리(増田長盛)를 토사로 보내, 성 펠리페호의 적하를 몰수합니다. 성 펠리페호가  크리스트교를 포교한 뒤 일본을 점령하기 위해, 그 사전 작업으로 측량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정말로 스페인이 일본 정벌을 계획 했다는 설, 통역 실수설, 쵸쇼카베 모토치카와 마시타 나가모리의 공작설 등 다양한 설이 제기 됩니다만, 아무튼 히데요시는 이 과격한 행동을 취했습니다. 선원들은 도보로 나가사키로 호송되어 일본인 신도들 26명과 함께 쳐형되어 버렸습니다.



문제의 성 펠리페호



 하지만 히데요시가 크리스트교에 대해 불안감을 가진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히데요시가 '기리시탄 금지령'을 반포한 직후, 일본 예수회 관할구역장인 가르파스 코엘요는 크리스찬 영주들에게 무기, 탄약의 지원과 필리핀의 스페인 병사들의 도움을 약속하며 히데요시를 공격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발리아노 크리스찬 영주에게 나가사키에 무기, 탄약을 모으고 대포를 준비하는 명령서를 내고 있습니다. 또, 이 사건의 2년 후의 1599년에는 스페인인 예수회 페드로 데 라 크리스가, 예수회의 장에게 '일본은 해군이 약하고, 병기도 부족하므로, 만약 국왕 폐하가 원하신다면 우리들이 군사행동으로, 일본을 빼앗는 일도 가능하다'는 의미의 편지도 보내고 있습니다. 예전 종교편에서도 썻었지만(남만신교(크리스트교)) 당시의 크리스트교는 굉장히 야만적인 제국주의의 종교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계획이 진짜여서 일본이 식민지가 되었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개항을 먼저 하게 되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식민지로 전락했을 수도 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