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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미츠세의 변, 명문 기타바타케의 최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미츠세의 변, 명문 기타바타케의 최후



 덴쇼 4년(1576년, 오다 노부나가의 뜻을 받은 후지카타 토모나리(藤方朝成), 쓰게사부로 자에몬(柘植三郎左衛門), 다키가와 카츠토시(滝川雄利) 등이, 키타바타케 토모노리(北畠具教)를 이세 미츠세관(三瀬館)에 덮쳐 살해했습니다.



키타바타케 토모노리 초상화



 키타바타케 토모노리는 이세국 키타바타케가의 8대 당주 입니다. 아시는 바, 고다이고덴노(後醍醐天皇)의 겐무의 신정(建武の新政)을 지지해 남조의 군사를 이끈 키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의 자손입니다. 지카후사의 삼남 아키요시(顕能)가 이세국의 영주가 된 일로부터, 이세 일대에 독자적인 세력을 자랑하게 된 무라카미 겐지의 유파를 이어받는 명문입니다. 텐몬 22년(1553년)에 아버지의 은거로 뒤를 이은 토모노리 이미 이세의 남쪽에 가세해 다이와(大和) 우다(宇陀)군도 수중에 넣고 있었지만, 이 때 이세 아노(安濃)군을 지배하고 있던 나가노 후지사다(長野藤定)에 차남의 도모후지(具藤)를 양자에게 보내는 일에 성공해, 한층 더 세력 확대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세국



 에이로쿠6년(1563년)에는 토모후사(具房)에 영주직을 물려주고 은거합니다. 그런데도 아노의 실권은 토모노리가 잡은 채 였지요. 그런데에이로쿠 10년(1567년) 오다 노부나가가 북 이세에 침공합니다. 키타바타케의 지배 하에 있던 북 이세의 호족 칸베 토모모리(神戸具盛)에 삼남 노부타카(信孝)를 양자로 보내는 일에 성공하고, 그를 부하로 만든 노부나가는 이제 키타바타케가를 목적으로 정합니다.


 에이로쿠 12년(1569년), 노부나가는 7만의 대군을 인솔해 토모노리의 거성 오오카와치성(大河内城)에 쳐들어갔습니다. 이에 대하는 성병은 약 8,000명 뿐이었습니다. 초전에는 격렬한 저항을 거듭해 키타바타케군의 승리했었지만, 긴 농성전이 되자 힘을 잃어 갔습니다. 이윽고 자금은 바닥나 2개월 후에 토모노리는 항복을 결의했습니다. 이에 노부나가가 건 조건은 노부나가의 삼남 노부오(信雄)를 토모노리가 양자로 맞아들이는 일과 오오카와치성을 개성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득이 이 조건을 받아들인 토모노리 노부오에 오오카와치성의 성문을 열고 건네주고 자신의 딸 유키히메(雪姫)를 노부오에게 시집보낸 뒤 토모노리 자신은 출가해 미츠세(三瀬)에 은거했습니다. 양자로 보낸다고 하지만, 결국 이것은 그 가문을 빼앗는다고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대로 일이 풀려가지 않습니다. 얼마 뒤, 그 15대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노부나가의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하지요. 그러자 토모노리는 은밀하게 가이의 다케다 신겐과 연락을 하고, 요시아키의 요구에 따라 형성된 노부나가 포위망의 일각에 참가하려 하였습니다.


런 중에 덴쇼 3년(1575년)에는 노부나가의 강한 의사표명으로 키타바타케가의 당주 자리가 노부오가 차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노부오가 이세국의 실권을 차지한 이상, 이미 키타바타케의 존재는 노부나가에 있어 방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검호, 토모노리



 결국 덴쇼 4년(1576년),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은 후지카타 토모나리쓰게사부로 자에몬, 다키가와 카츠토시 등이 토모노리가 있던 미츠세관을 습격했습니다. 그들 3명 모두는 원래 키타바타케의 가신입니다. 그러나 키타바타케를 노부오가 이은 것이므로, 현시점에서는 노부오의 가신인 것입니다. 이 세명을 이끈 토모나리는 이 때 아버지 요시유키(慶由)가 노부오의 거성 다마루성(田丸城)에 인질로 유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명령 대로에 하지 않으면, 그 아버지가 어떻게 될지는 뻔했지요. 한편, 그들의 습격을 받은 토모노리는 쓰카하라 보쿠덴(塚原卜伝)에 검을 전수 받았다는 검호로, 신음류의 카미즈 노부쯔나(上泉信綱)에도 검을 배웠으며야규 세키슈사이 무네요시(柳生石舟斎宗厳)도 친교가 있었다고 하기 때문에, 검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입니다.



다마루성의 모습입니다



 에도시대의 「관영제가계도전(寛永諸家系図伝)」에 의하면, 이 습격을 받았을 때 토모노 혼자서 19명을 베어 죽이고, 100명에게 중경상을 입게 할 정도의 저항을 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수중에 있던 아들 토쿠마츠마루(徳松丸), 카메마츠마루(亀松丸)도 포함해 그 자리에 있던 가신들과 함께 사망합니다. 토모노리 향년 49세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키타바타케의 한 집안이나 주요했던 가신이, 인질과 같이 다마루성에 있었는데요 그들 모두가 살해당합니다. 미츠세의 변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인해 전국 다이묘로의 키타바타케가는 멸망 해, 완전히 오다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키타바타케가의 후손들 역시 오다의 칼을 피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