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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다 노부나가와 이시야마 혼간지 격돌! 텐노지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다 노부나가와 이시야마 혼간지 격돌! 텐노지 전투



 덴쇼 4년(1576년) 이시야마혼간지를 포위한 오다 노부나가 군의 성채를 둘러싼 격렬한 공방전인 텐노지 전투가 전개되었습니다.


이시야마혼간지의 모습



 오다 노부나가와 결별한 제15대 무로마치 막부 쇼군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요청으로, 아자이 나가마사, 아사쿠라 요시카게, 다케다 신겐등의 무장에 의해서 형성 된 노부나가 포위망에는  제11대 혼간지 법주 켄뇨(顕如)가 더해져, 전국에 잇코우 잇키를 일으키며 오다를 적대하고 있었습니다. 현재의 오사카성 위치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이시야마 혼간지는 이런 잇코우 잇키의 중심이 되는 장소였습니다. 그런 혼간지와 노부나가와의 전투인 이시야마 전투는, 겐키 원년(1570년)부터 덴쇼 8년(1580년)까지 11년에 걸쳐서 전개됩니다. 한때는, 그야말로 전원을 적으로 돌려, 위기의 연속이었던 노부나가도 아자이, 아사쿠라를 넘어뜨리고, 요시아키를 추방한 뒤, 신겐의 죽음으로 점차 포위망의 장수들을 하나하나 정리합니다. 덴쇼 2년(1574년)에는 나가시마 잇코우 잇키를 종결시킵니다. 그 다음해 덴쇼 3년(1575년)에는 노부나가와 켄뇨의 사이에 강화가 성립해, 잠시 휴전이 됩니다. 사실 이것은 서로의 히을 기르기 위한 시간이 필요해서 이뤄진 것이었습니다.

 이 강화 중에, 노부나가는 아즈치성의 건설을 급히 하고, 켄뇨는 총에 뛰어난 기슈의 사이가중을 부르고, 이 혼란의 장본인인 요시아키는 신겐 사후에 노부나가 포위망을 강화시키기 위해 우에스기 겐신과 모리 데루모토에게 도움을 요구합니다. 결국, 앞의 강화로부터, 불과 반년 후의 덴쇼 4년(1576년), 다시 전투의 포문이 열립니다.



포위되어버린 이시야마 혼간지



  북동의 모리구치, 북서의 노다, 미나미의 텐노지와 석산본원사를 둘러싸듯이, 많은 성채를 구축한 오다의 군세는 각 성채를 거점으로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藤孝), 하라타 나오마사(原田直政) 등이 혼간지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이 때 이시야마혼간지에는, 4만여명의 신자가 농성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만, 노부나가 스스로 선두지휘에 서 높은 사기를 지닌 오다군의 맹공격에 의해 한때는 패색이 짙어진 혼간지였습니다. 그러나, 덴쇼 4년(1576년) 켄뇨가 설득했던 사이가중이 이 곳에 등장합니다. 키즈가와 입구에서 반대로 오다군을 포위한 사이가중은, 수천정의 총을 일제 사격합니다. 



붉은법의의 혼간지 켄뇨



 이로 인해 나오마사는 전사 하고 여러 장수는 당황해서 텐노지 성채로 도망칩니다. 이 날의 패전에 노부나가까지도 일단 와카에성(若江城)으로 퇴각해, 태세를 재건합니다. 이윽고 다시 혼간지에 쳐들어간 오다군은 5배 가까이의 수의 신자가 농성하는 데도 손쉽게 승리해, 혼간지의 문앞까지 바싹 쳐들어갑니다. 「음덕태평기(陰徳太平記)」에 의하면, 이와 같이 혼간지가 위험해졌을 때 새빨간 법의를 입은 켄뇨가 모두의 앞에 나타나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오다의 군사일지라도, 눈 깜짝할 사이에 무기를 버려 염불을 외우기 시작해 그것으로 인해 형세가 역전했다고 하지만 켄뇨가 부처도 아니고, 이 책 자체가 소설 성격이 강하므로 굳이 믿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단지, 켄뇨의 행차에 의해서 혼간지 문도들의 사기가 오른 일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오다군과 같이 전투 경험이 많은 집단이 아닌 그들에게는 사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겨우 비등하게 싸울 수 있었겠지요. 여하튼, 이 텐노지 전투의 뒤에, 한층 더 성채의 수를 늘린 노부나가에 의해 농성 하는 혼간지측은 완전하게 고립 상태가 되어, 확보한 자금이 없어지는 것도 시간 문제가 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모리 모토나리의 아들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였습니다. 모리의 부하 무라카미수군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부하 코바야카와 수군은 그 뛰어난 해상전 실력을 남김없이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