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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시라타가하라 전투(3) 다케다와 오다의 운명이 갈린 시라타가하라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시라타가하라 전투(3)

다케다와 오다의 운명이 갈린 시라타가하라 전투




 덴쇼 3년(1575년) 시라타가하라에서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과 다케다군이 부닥쳤습니다.


 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이 보였습니다. 다케다 가쓰요리가 이끄는 약 1만 2000의 군사는 시라타가하라에 진군해 학익진을 펼쳤습니다.(일본 전국시대의 진형) 한편, 렌고가와(連吾川)를 끼고, 정면에서 마주 보는 형태로 포진 한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과 다케다 가쓰요리군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새벽 6 시경 가장 왼쪽에 포진한 선봉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昌景)가 개전을 고하는 북을 치고, 목책의 좌측을 돌아, 도쿠가와군의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忠世)와 격돌합니다. 



시라타가하라 전투 전황도


 타다요는 과감하게도, 총포대를 목책의 앞으로 내보내 응전합니다. 적이 가까워지면 목책 안으로 물러나고, 적이 물러나면 다시 목책의 밖에 나와 공격한다고 하는 것을 반복합니다. 다케다 측에서 두 번째로 출진한 것은 중앙의 다케다 노부야쓰(武田信康)와 나이토 마사토요(内藤昌豊)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오바타 노부사다(小幡信貞)와 그의 반대의 우익에서 네 번째로 다케다 노부토요(武田信豊), 다섯 번째의 바바 노부하루가 사쿠마 노부모리의 진지를 공격합니니다. 


그러나 이 시타라가하라는 많은 시냇물이 흐르는 습지대입니다. 게다가, 연일의 비로 한층 더 질퍽거렸기 때문에, 투구와 갑옷을 지닌 중장비의 무사를 실은 기마는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목책의 앞의 해자에 진로를 방해되어 다케다의 기마대는 생각하는 것처럼 공격을 할 수 없었습니다. 



두 가문의 명운을 건 시라타가하라 전투



 노부나가는 여기서 한가지 책을 겁니다. '적마가 넘어올 때 가까워 질 때까지 총격을 가하지 마라. 아주 가까워 져 퇴각을 하지 못할 거리에 들어서면 비로소 총을 쏘라.'고 했다고 합니다. 「보암노부나가기(甫庵信長記)」에서는, 노부나가는 3000정의 총을 준비해 이것을 1000정씩 3 부대로 나누어 돌아가며 격발하고 장전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총은 장전에 매우 시간이 걸렸으니까요.


 이런 전략에도 지지 않고 끊임없이 다케다군은 돌진했습니다만, 기마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차례차례 쓰러져 갔습니다. 우익에서 출진했던 쓰치야 마사쓰구(土屋昌次)는 어찌어찌 적진을 돌파해 갔습니다만, 결국 총탄을 맞고 쓰러져 버립니다. 중앙으로 돌격했던 나이토 마사토요의 부대도 혼다 다카가쯔대와 전투해, 세번 째 목책에 다다랐을 때는, 불과 24명 만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삼단격발


 이 즈음에서 후방의 나가시노성 부근에서 연기가 솟아올라 다케다군은 토비가쓰야마 성채의 함락을 알게 됩니다.(토비가쓰야마 성채 기습) 이에 퇴로가 끊어졌음을 알게된 다케다군은 분전했습니다. 하지만 이윽고 오후 1 시경, 역전의 용사가 차례차례로 전사 하는 가운데, 학익진의 양익이 무너지고 패색이 짙어진 것을 깨달은 아나야마 노부키미(穴山信君)나 다케다 노부토요 등의 무장들이, 재멋대로 철퇴를 개시하기 시작해 다케다군의 패색이 짙어 집니다. 이 상황을 본 노부나가가 총공격의 명령을 내리고, 다케다 측의 측근들도, 가쓰요리에게 철퇴를 진언 합니다. 그런데도, '죽음을 각오해 오다와 도쿠가와를 토벌한다!' 고 하던 가쓰요리였지만 마침내, 측근들의 진언을 들었습니다. 


오후 2 시경, 퇴각을 알리는 소리가, 시타라가하라에 울려 퍼졌습니다. 퇴각의 후미를 맡은 것은 신겐 때 부터의 중신 바바 노부하루, 오전 중에 사쿠마 노부모리에게서 빼앗은 마루야마의 진지에서 전황을 눈앞으로 본 노부하루는, 가쓰요리를 원호하면서 퇴각해, 주군의 철퇴를 확인한 후에 군세를 돌려, 역시 나이토 마사토요와 함께, 추격 하는 오다군을 막다가 장렬히 전사했다고 합니다. 한편, 나가시노성 측으로의 퇴로가 끊어진 가쓰요리는 가신들과 함께, 토요가와를 따라 도망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위의 전황은 후세에 창작된 것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예의 총포대 VS 기마대의 구도는 메이지 시대에 나온 이야기 이지요. 이런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 「일본 전쟁사」는 메이지 시대에 서양식 군대를 도입하며 일본 국내의 전쟁사를 정리한 것인데요. 이 책이 참고한 위의 「보암노부나가기」는 메이지 시대의 전쟁 소설입니다. 따라서 보통 「신초코기」에 중점을 두는 것이 일반 적입니다. 이 책에는 준비된 총은 단 1,000정이였고, 세 부대로 나뉘어져 있다는 이야기도 전혀 나와있지 않습니다. 기마대가 진흙탕에 발이 묶였는데, 같은 전장에 있던 노부나가의 총포대는 일사분란하게 전투를 수행했다는 것도 말이 안되지요.



일본말의 크기입니다

 또한 전국 시대의 기마대 또한 우리가 상상하는 기마대와는 모습이 달랐습니다. 이 시대에 말을 타는 것은 신분이 꽤나 높은 사람들 뿐, 이들이 일사분란하게 훈련을 받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일본의 말은 태생적으로 체구가 작아 서양의 기마대와는 또 이미지가 다른데다가 속도도 그리 빠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기마대가 그리 효율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케다의 기마대도 적에게 다가가 말에서 내려 전투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네요. 


 이렇게 되면 시라타가하라 전투는 단지 수가 많은 노부나가군이 압살한 것 같습니다만, 노부나가의 책략으로 토비가쓰야마가 점령되고, 이에 퇴로가 끊긴 가쓰요리가 배 이상의 군대에 돌진하게 한 것은 다름아닌 노부나가의 공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