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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시타라가하라 전투(1) 전투의 서막이 올라가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시타라가하라 전투(1) 전투의 서막이 올라가다



 덴쇼 3년(1575년) 미카와 나가시노성 구원에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 약 3만이 시타라가하라(設楽原)에 도착했습니다. 


시라타가하라 전경



 나가시노성이 공격을 받자(나가시노성 공방전), 나가시노성의 성주 오쿠다이라 노부마사는 전령을 보내(토리이 쓰네몬 가츠아키) 이야에스에게 원군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당시의 이야에스는 미카타가와라의 상처를 입은 상태로, 별로 힘이 없었습니다. 이야에스는 결국 동맹인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합니다.


 이때가지도 반 노부나가 동맹은 건재한 상태지만, 노부나가는 결단을 내려 다케다군을 막으러 이동합니다. 재빠르게 오사카에서 기후로 이동한 그는 어느새 3만을 인솔해 기후를 출진해 오카자키로 향합니다. 그리고 이야에스를 만나자 마자 나가시노성의 전령, 토리이 쓰네몬 가츠아키에게서 소식을 듣지요. 그로부터 충분히 소식을 들은 오다는 연합군을 이끌고 나가시노성으로 급히 향합니다.


 이대로 노부나가의 대군에 역으로 포위를 당해서는 이쪽이 오히려 열세가 됩니다. 포위를 느슨하게 해 원군에 선제 공격을 가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포위를 아예 풀고 일단 철수 할 것인가? 고민하는 중에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은 나가시노성의 1리(4 km) 앞에 있는 시타라가하라에 도착했습니다. 당장이라도 공격해 포위당할 까봐 전전긍긍하던 다케다 군앞에 이보란 듯이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은 진을 칩니다. 실은 이에야스와 합류하자마자 열린 군의에서 노부나가의 방침은 이미 결정되고 있었습니다. 나가시노성을 역 포위하는 것이 아니라, 앞의 시타라가하라에 다수의 성책, 망루를 쌓아 올리고 여기에 다케다군을 유인해 싸우기로 했지요. 아군의 손실을 최대한 줄이려고 한 것입니다.


보통 시라타가하라 전투의 이미지는 이렇습니다


 사실 나가시노 전투를 그린 그림이나, 여러 서적에는 노부나가의 3단 총 공격으로 다케다의 기마 군단이 휙휙 쓰러진다고 하는 노부나가 대승리의 이미지가 강했지만, 최근에는 다른 견해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시타라가하라에서 발견되는 총알의 수가 매우 적고, 전투가 무려 8~9시간이나 걸렸으며, 3단으로 총을 쏠 수 있을 정도의 3,000정의 총을 노부나가가 확보할 수 있었는지라고 하는 여러가지 의문이 들지요. 그렇다면 사전에 쌓아올린 성책이 승리의 열쇠 아니었을까요? 


 시라타가하라는 수많은 가는 강이 종단 하는 습지대로, 군데군데 기복이 있는 구릉도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지형을 이용해 렌고가와(連吾川) 뒤편으로 목책을 세우고 그 뒤로 해자(空堀)나 토루를 쌓아 올려 시라타가와의 반이 성이 된 것 같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더라도 다케다 가쓰요리가 쳐들어 오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요, 이애 노부나가는 사쿠마 노부모리를 시켜 배신한 척 하고 노부나가군이 사기가 없다는 소문을 흘리게 합니다. 이에 속아 넘어간 가쓰요리는 다케다군을 이끌고 오다 노부나가를 척살하기 위해 사타라가하라로 향합니다.